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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Sep 20. 2019

가장 무서운 이야기

존재의 이유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무서운 이야기의 원형이 있다. 하나는 나이 든 중년의 여자가 하는 여행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카프카의 '변신'이다.


먼저 중년의 여자가 하는 여행이야기는 어디서 읽었는지 누구의 작품인지도 모르고 오래전 읽어서 그 이야기의 디테일은 다 사라졌지만 그 여자의 무서움과 막막함은 남아 있다. 혹시 어떤 작품인지 아는 사람이 있다면 꼭 남겨주시길....


여자는 우연히 여행을 하게 된다.('우연히'라는 말에는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다. 암튼 그 여자는 나이가 들었고 넉넉한 형편에 여행을 많이 다니거나 하지 못했다. 아마 그 여행은 가족이 시켜준 패키지여행일 수도 있다. 힘들게 일하다가 모처럼 평생에 한 번일까 싶은 그런 여행이다.) 여자는 어떤 사소한 일들로 인해 일행과 떨어지게 된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아한다. 곧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낯선 타국의 땅에서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여자에게 두 번째 시련이 닥쳐오는데 여권과 돈이 든 가방을 도둑맞게 된다.


자, 이제 그 여자의 신분을 증명해 줄 수 있는 방법도 없고 배는 점점 고파지고 돈도 없는 마당에 언어도 통하지 않아 여자가 아무리 손짓 발짓해도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사람들도 처음에는 여자한테 관심을 가지지만 곧 자신의 삶을 살기 바빠진다. 날은 어두워지고 일행을 만날 길이 없고 도움을 청할 곳도 없다. 음식을 얻어먹고 잠을 길에서 청하면서... 여자는 점점 피폐해진다. 뭐 그런 이야기였는데 나는 그 이야기가 너무 무서웠다. 여자의 희망이 점점 절망으로 바뀌다가 나중에는 체념을 하게 되는 과정이 너무 적나라하게 그려졌다. 고작 '언어' 하나 통하지 않을 뿐이었는데도 여자는 그 세계에서 철저히 이방인이고 고립되었고 버려졌다. 그리고 여자는 그곳에서 전혀 다른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오래전 이야기다. 요즘이야 아무리 여권이나 지갑을 잃어버렸어도...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이 있으니 이렇게까지 고립될 일은 없다지만.. 언어를 능숙하게 하지 않는 이상 낯선 곳의 여행은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설 때가 많다.


또 다른 하나는 카프카의 '변신'이다. 많이 알고 있는 작품이지만 처음 읽었을 때의 소름과 충격을 잊지 못한다. 어느 날 주인공은 거대한 한 마리의 벌레로 변신한다. 말 그대로 시커먼 껍질을 둘러싸고 더듬이가 나있는 벌레 말이다. 가족은 일어나지 않는 주인공을 깨우러 들어갔다가 한 마리의 거대한 벌레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지만 곧 그임을 알아차린다. 가족은 처음에는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관심을 갖지만 일도 할 수 없고 그저 벌레에 불과한 주인공을 서서히 잊어간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아 외면한다. 나중에는 흉측한 벌레인 그를 그저 벌레라고 생각하면서.. 빨리 죽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는 벌레로 변신한 채 쓸쓸히 침대 위에서 죽어간다. 정신과 내면은 똑같지만 외면은 벌레로 변신한 그는 과연 그일까, 아닐까? 말도 하지 못하고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이 흉측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그 벌레를 과연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닐까? 그는 왜 벌레로 변신해야 했을까?


이 이야기 역시 앞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주인공은 똑같지만 고작 '벌레'로 변하자 고립되고 버려졌다. 이 이야기는 변신한 주인공으로 대입해봐도 아니면 변신한 존재를 바라봐야 하는 가족으로 대입해봐도 소름이 끼친다. '자신'을 자신으로써 증명하고 존재하게 하는 것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자신만의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것인가. 똑같은 존재지만 어디선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사람은 결국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가. 나는 항상 그런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동시에 두려움을 갖는다.



*PS-

이 이야기는 오늘 오전에 죽인 채 플라스틱 뚜껑에 갇혀 있는 한 마리 벌에서 시작했다. 파리채로 몇 번을 내리쳐 다리와 꽁무니가 떨어져 나간채로 살아서 움직이다가 그마저도 못하고 서서히 죽어간 벌을 나는 끝내 휴지로 싸서 꼭꼭 눌러 죽이지 못했다. 내 손끝으로 느껴야 하는 전혀 다른 '존재'의 '실체'에 대한 소름과 혐오감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벌레를 죽이지 못한다. 벌은 그저 벌이었는데 내가 있는 곳으로 들어와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죽은 사체마저도 나한테는 소름을 유발할 뿐이다. 왜 내가 그토록이나 저 두 유형의 이야기에 무서움을 느꼈는지 알 것 같다.


벌은 벌인데.. 어렸을 때 내가 갖던 느낌과 지금의 내가 갖는 느낌은 너무 다르다. 어린 시절 난 분명히 송충이를 잡아 털을 불에 그슬리고 개미굴을 하루종일 관찰하고 물도 붓고 잠자리 날개도 잡아뜯고 방아깨비 다리도 잡아서 좌우로 흔들어대며 놀았고 심지어 개구리도 잡아 돌에 패대기치고 구워 먹어도 봤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을 온전히 '인지'하지 못한 채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시절에는 분명히 지금처럼 곤충과 벌레에 혐오감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실체로 내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벌의 명복을 빌며...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Photo by Jari Hytöne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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