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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Aug 05. 2020

조금 많이 늦더라도 괜찮아

빨간머리앤에게 배우는 나를 나답게 해주는 문장

어린 시절 주일 아침마다 교회에 데려가려는 선생님과 만화영화를 다 보고 가야 한다는 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었다. 그때 했었던 만화는 세계명작극장이라는 타이틀로 일본 후지 TV에서 만들었던 애니메이션들이었고 그중에 빨간머리앤도 있었다. 당시 내게 있어 빨간머리앤은 나의 친구였다. 예민하고 유난하다는 말을 들었던 내가 나와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친구를 만났던 거다. 어린 마음에 다이애나와 평생의 친구를 맹세하던 장면이 너무 부러워서 학교 다닐 때 신었던 하얀색 팬티스타킹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이 하얀색 팬티스타킹이 앤의 빨간 머리겠거니 상상하며 앤과 친구가 되는 맹세를 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어느새 중년의 나이가 되었어도 빨간머리앤은 여전히 우리의 친구로 남았다. 다양한 버전의 책으로 영화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캐스팅 싱크로율이 100%라는 넷플릭스 빨간머리앤을 오랫동안 보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싱크로율이 좋아도 내 어린 시절 추억으로 남아있는 빨간머리앤 애니메이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 추억을 괜히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앤과 친구였을 때는 상상력만 풍부하면 뭐든 다 잘 해낼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어른이 되면서 내가 갖고 있던 그 상상력이란 현실과는 동떨어진 망상에 불과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어느새 밥 먹고 살기 급급해져 버렸다. 삶은 절대 녹록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나는 수시로 흔들리고 막막해진다. 아무것도 이뤄놓은 것이 없고 내일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가슴 졸이는 밤들이었다. 


그런 밤들에 넷플릭스 빨간머리앤을 한 편씩 봤다. 내가 알고 있던 앤의 스토리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여전히 앤은 앤이었다. 끝에 e가 붙는 앤 말이다. 달라진 건 앤이 아니라 나였다. 어린 시절에는 상상력 풍부하고 말 많고 통통 튀던 앤의 특별함이 지금 다시 보니 그렇게 시끄러울 수가 없더라. 심지어 고집불통에 자기주장만 중요하고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가. 게다가 앤이 살고 있는 에번리에선 뭐가 그렇게 쉬울까. 아이들끼리 연대하고 편견을 갖고 있던 어른들에게 한 방 먹이고 소외된 자를 감싸 안는다. 그런 앤에게 어른들도 동화되고 엄격했던 마릴라 아줌마도 어느새 앤의 편에 있지 않는가. 내가 꼰대가 된 건지. 아니면 나는 더 이상 앤의 친구가 될 수 없는 건지 헷갈려하던 때 두 문장이 내 가슴을 쳤다. 



인생은 가장 캄캄한 곳에 선물을 숨기기도 하네요


고아원에서 왕따를 당하며 모진 구박과 학대 속에서도 밝게 큰 아이, 고아원에서 숱하게 아이들을 돌보면서 저절로 습득한 육아 기술을 다이애나의 어린 동생을 구하거나 메리의 갓난아기를 키우는데 보태면서 했던 말이었다. 자신의 가장 캄캄했던 시절에 배울 수 있었던 것이 선물이 되기도 한다는 말. 그렇다면 지금 내 어둔 삶의 어딘가에도 선물은 존재하겠지. 내 삶의 타임라인을 봤을 때 지금 이 시절이 필요한 이유가 있겠지. 그러니 캄캄한 구석에 앉아서 울 수만은 없지 않은가. 하기 싫은 이 일이 큰 선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내 가치를 정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


이 말이야말로 앤을 앤답게 했던 말이 아닐까. 자신의 가치를 정하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말은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쉽게 다른 기준에 맡겨 버린다. 물질 혹은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환경 등에 말이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나의 가치는 어떻게 될까. 지금 나의 가치를 정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매일 밤 한 편씩 보는 빨간머리앤 시리즈는 지금 내게 귀한 위로가 되고 있다. 어린 시절 친구를 다시 만난 기분이랄까. 끝에 e가 붙는 앤,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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