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수도 아니고 간디도 아니다. 예수는 다른 쪽 뺨도 내밀라고 가르쳤으니 우린 양쪽 뺨을 때릴 겁니다.
신념이란 무엇인가. 어떤 현상, 사실 등을 굳게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주로 초월적인 존재나 경외의 대상을 향해 믿는 마음이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신념이나 믿음 등을 종교 속에서 보곤 한다. 물론 자칫 잘못하면 그러한 믿음이나 신념 등은 전혀 옳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일테면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보다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아예 모르면 모를까, 책 한 권만 읽고 그 책이 이 세상의 전부인양 믿어버리는 경우가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미 그러한 예는 차고도 넘친다.
그렇다면 오쇼 라즈니쉬가 이끌었던 산야신들의 믿음과 신념은 무엇이었을까?
또 오쇼는 누구였던가? 보고 싶었던 다큐멘터리였던 "오쇼 라즈니쉬의 문제적 유토피아"를 드디어 보았다. 하지만 다 보고 나서도 나는 오쇼가 누구였는지 잘 모르겠다. 왜냐면 이 다큐멘터리는 오쇼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오쇼를 믿고 따랐던 몇몇 인물들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터뷰와 옛 영상들로 이뤄진 이 다큐에선 오히려 오쇼의 비서였던 쉴라가 주인공처럼 보인다. 그러니 이 다큐는 한 때 신념과 믿음에 사로잡혔던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맞을 것이다.
사실 나는 오쇼 라즈니쉬에 관심이 없었다. 한 때 인도 여행 붐이 일었을 때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정도가 나한테 있어 인도의 인상이었다. 그런 나한테 오쇼 라즈니쉬란 요가에 관련된 일종의 명상 단체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예전에 한국에서도 그를 따르거나 그에 관련한 책이나 단체들이 꽤 많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가 창시했다는 다이내믹 명상은 나조차 어렴풋이 알 정도니 당시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성병 없고, 범죄 없고, 마약 없고, 알코올 중독 없는 공동체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죠. 섹스를 완벽하게 즐기는 것도 우리뿐입니다.
오쇼의 비서였던 쉴라는 오쇼를 인도에서 미국으로 이끌었던 인물이다. 미국으로 오쇼의 거처를 옮기는 데 성공하면서 그녀는 실세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그들이 만들려고 했던 공동체(코뮌)는 무엇이었을까? 미국의 작은 시골마을 앤텔로프 사람들은 어느 날 말 그대로 들이닥친 그들로 인해 카오스 그 자체에 휩싸이게 된다.
붉은 옷만 입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성문화와 광기에 가까운 에너지를 내뿜는 그들을 보수적인 시골 사람들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경계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들은 그저 침입자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라즈니쉬의 코뮌은 이 시골 마을을 하나씩 잠식해 들어간다. 집을 사들이고 카페를 사들이고 마을을 점령한다. 코뮌의 앞에는 쉴라가 있다. 까만 피부, 커다란 눈, 작고 아담한 체구의 그녀는 거침이 없다. 묵언수행에 들어간 오쇼 대신 전적인 신뢰를 얻고 있는 그녀는 각종 언론과 인터뷰에서도 당당하고 도발적이다. 매스미디어를 어떻게 구워 삶아야 하는지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데 전 그저 일을 한 것뿐이에요.
사실 다큐멘터리가 진행되면서 나는 오쇼 라즈니쉬보다는 쉴라한테 빠져있었다. 현재의 나이 든 백발의 쉴라가 인터뷰를 통해 옛날 일을 떠올리는 형식이라 나이 든 쉴라와 젊은 시절 코뮌을 이끌던 쉴라의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묘한 일이었는데 한 가지 똑같았던 건 쉴라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물러나거나 축소하지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시종일관 당당했다. 확신에 찬 삶. 그게 쉴라가 삶을 대하는 태도 같아 보였다.
종교가 정부와 같은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고 기본적인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게 되므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쉴라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투표를 이기기 위해 미국 도시 곳곳에 있던 노숙자들을 끌어모으고 이들이 골칫거리가 되자 몰래 맥주 등에 진정제를 투여한 일부터 자신들을 공격하는 정치인들을 살해하려고 했던 일까지 걷잡을 수 없이 일을 크게 만든다. 결국 쉴라는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과 함께 코뮌을 떠나게 되고 이에 침묵하던 오쇼가 앞에 나서 쉴라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이르게 된다.
전반부가 오쇼가 쉴라를 앞세워 일종의 유토피아를 미국의 한 시골 마을에서 건설하면서 일어난 일이라면 후반부는 쉴라가 떠나면서 오쇼와 대립하는 이야기다. 원래 팬이 뒤돌아서면 안티팬이 된다고 했던가. 오쇼는 쉴라를 향한 맹렬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고 FBI까지 나서 사건을 수사하기에 이른다.
결국 둘 사이의 분열로 틈이 벌어지고 벌어진 틈을 이용해 오쇼와 쉴라 두 사람을 잡아들이게 된다. 이후에 오쇼는 다시 인도로 돌아가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나고 쉴라는 스위스에서 노인센터에서 노인들을 돌보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 다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죽어서 지옥에 갈지 천국에 갈지는 모르지만 상관없어요. 저는 어딜 가든 저만의 낙원을 만들 거예요.
이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오쇼 라즈니쉬를 따랐던 몇몇은 오쇼를 여전히 사랑하고 따르고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오쇼 라즈니쉬 사후까지도 이렇게나 애틋하게 그를 기억하고 떠올리게 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엔 오롯이 몰입하던 자신들의 젊음과 열정을 그리워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서 오쇼 라즈니쉬의 실체는 끝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형형한 그의 눈빛에 보통 사람은 아니겠구나 싶었지만 그게 다였다. 내가 알고 싶었던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손에 잡히지 않던 어떤 한 인물을 무조건적인 신뢰와 추종으로 한 시대를 함께 보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에 가까웠다.
자신은 모든 죗값을 치렀다며 어딜 가든 자신만의 낙원을 만들 거라는 쉴라의 마지막 말은 신선한 충격에 가까웠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 앞에 반성과 후회로 점철될 줄 알았던 내 기대와는 달리 그녀는 끝까지 행복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오쇼 라즈니쉬를 믿고 따랐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결국 그녀를 끝까지 이끌었던 것은 그녀 자신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믿음과 신념이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지 어떻게 변하게 만드는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신념과 믿음이 어떤 공포가 되는지 알고 싶다면 이 다큐멘터리를 추천한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