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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Sep 03. 2022

그 아이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가족한테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왜 이렇게 변했어? 어려서는 안 그러더니?"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대사는,


"내 나이가 몇인데 이젠 아줌마지."


근데 말하면서도 웃긴다. 여기서 '아줌마'라고 말하는 자체가 아줌마는 말이 많고 뻔뻔하며 창피함을 모르고 주책이라는 말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우리 가족이 내가 변했다고 하는 말에 내포한 의미가 그렇기 때문이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그저 내 나이가 아줌마라고 불리는 나이가 되었으니 나는 전혀 아줌마가 될 생각도 없고, 아줌마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변했다고 한다면 그냥 '아줌마'라서라고 퉁치고 말게 된 것이다. 나도 안다. 아줌마라고 퉁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편협한 사고방식인지. 


그런데 나는 나인데 자꾸 내가 변했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저 시간이 흘렀으니 어떤 식으로든 예민하게 반응할 것들도 둥글게 넘어가고 어색하고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이가 이쯤 먹었으니 내가 먼저 말을 건네고 이끌어 갈 줄 알게 된 것뿐이다. 당연히 말수가 늘고 사회적인 웃음이 많아졌으며 적당히 표정관리도 할 줄 알게 되었다. 어렵고 힘든 자리에도 내색하지 않고 견딜 줄 알게 되었다. 


마음에 상처 입는 말들도 애써 드립으로 받아치려고 노력하고 '적당히' 타협하게 되었다. 그래야 견디고 버티겠지. 안 그러고 하나하나 온전히 내 마음 안으로 받아들이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물론 그러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지 않았다고!


오늘 하루 종일 공원에서 그늘막을 치고 뒹굴거리면서 문득 난 어떤 아이였던 걸까 생각해 봤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아니다.) 때 화장실 간다고 손도 못 들고, 소변은 간신히 봐도 대변은 절대로 볼 수 없어 집에 오면서 지린 적도 있다. 융통성 하나 없고 하나를 가르쳐 주면 그 하나만 알고 똥고집을 부리는 아이였다.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동경하고 무조건 신뢰하는 경향이 많았다. 선생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그렇다고 믿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많은 선생님들을 짝사랑하고, 심지어 대학시절 내내 가슴앓이 했던 상대도 과대표였다. 


주목받는 것엔 약해도 인정에의 욕구는 강해서 발표는 쥐약이었어도, 숙제는 열심히 해갔다. 지금도 맡겨진 일에는 성실한 편이다. 단적인 예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방학 숙제로 영어 숙제를 내줬는데 두꺼운 영어 사전에 있던 A부터 Z까지 모든 단어들을 손으로 다 써서 철까지 해서 가져가서 선생님을 놀라게 했고 그 과제로 결국 상을 받았다. 


내가 관심 있고 가장 잘하고 싶던 미술 과제는 그 노력과 집착이 광적일 정도였는데... 

유치원 때 사생대회에 참석해 '꼬꼬 마을'이라는 닭과 병아리를 칠하는데 보통 아이들은 엄마와 즐겁게 대충 마무리하는 걸 나는 엄마가 꼼꼼히 칠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아 엉엉 울었다. 시간은 촉박하고 엄마는 마음에 안 들게 칠하고 결국 선생님이 와서 도움을 주고서야 무사히 끝이 났다. 그렇게 꼼꼼하게 칠했던 나의 꼬꼬 마을은 호주 대사상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중학교 때 미술 시간에 점묘화에 대해 배우면서 점묘화 과제로 디즈니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일일이 점을 찍어 완성해 갔다.  고등학교 때 미술 발표 시간에 '반 고흐'에 대해 준비하면서 도서관에 가서 반 고흐에 대한 책을 수십 권을 복사해 와서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다 읽고 연대별로 요약정리해서 발표를 했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 내가 지금도 반 고흐를 가장 좋아한다. 왜냐면 가장 많이 아는 화가니까.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나는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융통성 없이 고집만 셌다. 하지만 그 안에 순수했던 열정과 노력이 가득했다. 인정받고 싶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엔 요령 없이 미련 맞게 노력했다. 그런데 어쩌다 그런 열정과 노력이 없어졌을까. 언제부터 빠르게 '체념'하고 '포기'하게 되었을까. 해도 안 되는 것들이 언제부터 많아지고 '난 안 될 거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나는 내가 오랫동안 특별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언젠간 멋진 백조로 탈바꿈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간 나의 진가를 발휘하게 되지 않을까. 솔직히 여전히 80대에 서핑하고 60대에 작가 데뷔하는 멋진 노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받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되새김질하고 있다. 알고 있다. 그런 소수의 몇 몇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내 얘기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싶다고.

그러니까, 누구나 꽃송이는 피워낸다고. 

그게 작든 크든 크기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나는 7살 때 나와 지금의 내가 똑같다고.

변하지 않았다고. 나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심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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