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웨이 엄마와 꼴통 딸의 스페인 여행 4
동생과 대판 한 나는 결국 풀지 못한 채 떨떠름하게 집을 나섰다. 10월 2일 스페인으로 가는 에미레이트 항공 자정 밤 비행기였다. 동생과 집에 있기 싫어서 일찍 집을 나섰다. 엄마한테 여권, 핸드폰, 약 챙기라고 잔소리를 하더니 정작 나는 국내용 체크카드만 덜렁 들고 나오는 바람에 교통카드가 없어 은행에 가서 현금을 뽑아 1회권 교통카드를 뽑았다. 처음부터 어째 조짐이 좋질 않다.
공항에 도착했다. 몇 년 만에 와본 공항인지 막상 밥을 먹으러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라 대충 기억을 떠올려 2층으로 향했지만 다들 밤비행기 타러 온 건지 초입부터 줄이 장난 아니다.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 오믈렛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정말 여행들 많이 가는구나.
공항에 오면 늘 해물순두부를 먹었던 거 같은데 오늘은 새우튀김 오믈렛과 돌솥밥을 시켰다. 맛은 공항에서 먹는 맛(맛이 없지도 맛이 있지도 않은 그런 맛)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도 남기지 않고 다 비웠다.
밤 비행기인 데다가 일찍 공항에 온 터라 밥을 먹고 들어왔어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라운지 이용을 안 하고 편하게 쉴 곳을 찾는 다면 곳곳에 있는 냅존을 찾아가 보자. 전에는 이런 곳 찾을 생각도 없이 면세점들 구경하다가 게이트 앞에서 죽치고 앉아있었는데 이젠 나이가 드니까 편한 곳만 찾게 된다.
냅존은 공항 출국장 4층에 있는데 난 항상 4층 올라가는 데 찾는 게 힘들다. 나 같은 길치 방치들 위해서 좀 쉽게 올라가는 곳 표기 좀 해주면 안 되나? 암튼 기대 없이 올라갔다가 자리가 나서 냉큼 앉았다. 거의 침대처럼 누워서 쉴 수 있어서 좋긴 좋은데 자리에 쓰레기가 한가득이다. 우리 자리만 그런 게 아니라 곳곳에 쓰레기를 버리고 가서 새로 온 사람들이 자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다. 정말 너무한다.
공공장소 이용할 때 이런 에티켓은 지켜주면 좋으련만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냅존 이용하는 사람들 100%가 한국인들이었다. 예전에 아파트 지하 주차장 턱 위에 먹던 음료병 놓고 가는 사람이나 버스 안 바닥에 침 뱉는 사람도 봤어서 이젠 새삼 놀랍지도 않다. 쓰레기 통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를 태우고 갈 비행기는 에미레이트 항공사의 에어버스 A380-800으로 2층으로 된 대형 비행기다. 예전에 스위스 갈 때도 탔던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1층엔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이 2층엔 이코노미석이 마련되어 있다. 1층으로 올라갈 순 없어도 모든 비행기 좌석은 유료로 앞 좌석으로 구매했다.
비행기만큼 자본주의 레벨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곳이 있을까 싶다. 그걸 또 기분 나쁘지 않게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인상 깊다. 앞에 앉으니 화장실 앞에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는 데 각가지 술로 가득한 바가 바로 보인다. 일등석 손님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용할 테지. 계단 앞에는 함부로 올라갈 수 없게 줄이 쳐져 있다.
에어버스처럼 1,2층으로 구분되는 수직구조가 아니라 일직선으로 되어 있는 다른 비행기에도 엄연히 좌석 간의 구분은 뚜렷하다. 커튼을 치고 벽 사이에 난 긴 사각형의 창틀도 내려서 막아둔다. 완벽한 시선차단인 셈이다. 그러다가 랜딩 할 때는 또 커튼을 묶고 창틀도 올려뒀다가 내릴 때는 또다시 차단한다. 일등석 손님부터 내리기 위함이다. 이런 걸 이번엔 앞에 앉다 보니까 다 보게 되더라.
기분이 상한 게 아니라 신기한 경험이었다. 돈 낸 만큼 이뤄지는 철저한 구분과 다른 서비스,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불편해도 참고 언젠간 비즈니스석이라도 타보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항공사 입장에선 이보다 더 좋은 광고 효과가 있을까 싶다.
왜냐하면 예전과는 다르게 스페인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내내 너무 힘들었다. 오래 앉으니 꼬리뼈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고 목 디스크로 인한 왼쪽 어깨가 저리고 아팠다. 하필 오기 전에 퍼스트 클래스 후기 영상을 보고 와서 장시간 비행 동안 간절하게 편한 침대 좌석에서 누워서 가고 싶었다.
말은 안 해도 내가 이런데 칠순 울 엄마는 더하면 더했겠지. 괜히 죄송스러워지고 이왕 돈 들이는 건데 퍼스트 클래스는 아니더라도 비즈니스석이라도 끊어야 했었나 싶고. 이놈의 철저한 자본주의 비정한 하늘의 세계에 대해 한탄하며 갔던 고통스러운 비행시간이었다.
밤 비행기라 에어버스 천장엔 별이 가득하다. 이건 1층이든 2층이든 차별 없이 뿌려주는 거겠지. 2층엔 아예 은하수를 LED로 쏴주는 거 아니야? (꼬인 거 아니고 순수한 궁금함이다) 젊어서는 비행기 타면 잠도 잘 자고 화장실도 잘 안 가도 됐는데 나이가 들면 아무 데서나 잠도 잘 못 자고 화장실도 자주 가야 한다.
왕복 비행기 4번 모두 그러한 이유로 엄마를 복도 쪽에 나는 중간에 끼어가는 좌석으로 했다. 3-4-3 아니면 3-3인 대형이라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너무 걱정했는데 다행히 모두 여자였고 단 한 번만 남자였는데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무슨 문제라고 묻는다면 덩치가 커서 내 자리까지 넘어와 편하게 가질 못하거나 은근하게 터치를 시도하는 등의 문제고 모두 예전에 겪었던 문제였다)
에미레이트 기내식은 하도 찾아봐서 기대했는데 내가 깜박 잊고 있었다. 기내식은 기내식일 뿐. 인상 깊은 맛이 아니라 사진도 찍다가 말았다. 그래도 비스킷과 초콜릿, 곡물바는 다 가방에 챙겨서 나중에 들고 다니며 요긴하게 먹었다.
직항은 아니라서 두바이 공항에서 환승해야 한다. 3시간 30분가량의 환승 시간이라 시간은 충분하지만 두바이 공항이 워낙 넓다는 말을 들은 데다 초행이라 마음이 급하다. 역시 두바이 공항은 듣던 대로 새벽 시간에도 불구하고 휘황찬란하다. 시계판은 롤레스에 면세점 상점은 이 시간에도 번쩍거리고 여기야 말로 정말 자본주의의 한복판이다. 그리고 정말 넓다. 환승 게이트 찾아 가는데도 걸어서 15분이다.
두바이 공항에서 내가 인상 깊었던 건 화장실이었다. 화장실뿐만 아니라 공항 전체가 깨끗하긴 한데 화장실은 유독 심하다. 원래 화장실에서 세수도 하고 양치도 하려고 했는데 내가 갔던 화장실 청소하는 분이 너무 세다. 무슨 말이냐면 세면대 앞에 서서 정말 몇 초 단위로 물기 제거하는 스퀴지로 닦아내는 통에 뭘 할 수가 없다. 마치 '너 여기서 세수하거나 양치하면 죽인다'라는 포스다. 누구 하나라도 양치질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겠는데 아무도 안 한다. 내가 이제 여행시작이라 아직 여행력이 올라가지도, 뻔뻔함으로 피부가 두꺼워지지도 않아서 손 하나 씻는데도 눈치가 보이는 터라 어쩔 수 없이 쫓기듯 나왔다.
그분이 유독 심한 건가 싶었는데 올 때 두바이 화장실을 보니 여기가 원래 그런 곳이구나 싶었다. 청소하는 분이 그냥 내내 서서 바닥 닦고 물기 제거하고 화장실 쓰레기를 실시간으로 치운다. 그래서 그런지 티끌하나 없이 깨끗하다.
배는 고프지 않아 엄마랑 의자에 앉아 기내식에서 남긴 초콜릿 먹고 있었는데 엄마가 카페인 수혈이 필요하단다. 오는 길에 내내 배고프냐 뭐 마시냐 물었는데 그때는 괜찮다고 했다가 이제 와서 그러니 지나쳐 온 스타벅스가 아른거렸다. 하지만 다시 스벅을 가기엔 멀어서 게이트 앞에 있는 맥카페에 갔다.
자리가 난 곳에 엄말 앉혀두고 주문하고 왔는데 웬 나이 든 여자분이랑 같이 앉아 있다. 다른 곳에 자리가 없어 우리 자리가 4명이 앉는 둥근 원형 탁자라 합석하신 분이었다. 그분은 남편이랑 함께 여행하는 분 같았다. 처음엔 얘기도 안 했는데 그분이 먼저 말을 거셨다. 알고 보니 대만 분으로 현재는 호주에서 살고 있고 엄마랑 같은 나이였다. 지금은 은퇴해서 동갑인 남편과 함께 세계 곳곳을 여행 중이었다.
이미 스페인도 가보셨고 우리나라에도 와봤단다. 부산, 서울 등등 한국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쯤 말하면 내가 아주 유창하게 그분과 대화를 나눈 것 같지만 대부분 그분이 말하고 나는 연신 리액션만 해줬다. 하하. 영어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게 더 어렵다. 엄마 앞이라 다 알아듣는 척했지만 그나마도 대화의 50~60%만 알아들은 것 같다.
남편과 대학에서 만난 커플이라는 건지, 아니면 대학에서 언어를 전공해서 대학에서 일했던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영어 못하는 날 위해 최선을 다해 쉬운 영어로 천천히 얘기해 주셨건만, 이렇게 영어 공부가 간절했던 적이 없다. 여행에 가면 늘 드는 생각은 단 하나다. 영어 공부하자.
귀여운 대만 노부인이 내내 내게 했던 말은 그거였다.
너는 젊으니 여행을 많이 다녀라. 여행은 눈을 뜨게 해 주고 마음을 열게 해 준다. 그러기 위해선 돈을 열심히 벌어라. 자신은 늙었지만 마음만은 아직 젊다.
Save Money, Heart yong!
환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며 하던 말이 귀에 잊히지 않는다. 돈을 열심히 벌라는 물론 현실적인 조언도 잊지 않았지. 은퇴해서 세계 여행을 할 정도면 돈을 많이 벌었겠다는 내 질문에는 대답 대신 환하게 웃어주셨다.
내가 살아보니 몸과 마음의 여유로움이란 것은 결국 경제적인 여유에서 나온다. 먹고사는 것에 급급한 사람에게 그런 여유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내가 조금 더 어려서 들었더라면 마치 명언처럼 가슴에 새겼겠지만 지금 들으니 내가 살아온 삶이 후회가 되기도 하는 씁쓸함이 남는다. 엄마가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지금부터 열심히 벌면 되지. 나는 늙었지만 너는 돈 열심히 모아서 열심히 다녀!"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