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웨이 엄마와 꼴통 딸의 스페인 여행 8
10월 5일 아침, 호텔 조식을 하고 바로 나왔다. 아침 식사를 꼭 해야 하는 엄마 때문에라도 숙박하는 모든 호텔의 조식을 신청해 둔 터였다. 잉글라테라 호텔의 조식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후에 바르셀로나 H10호텔의 조식이 훨씬 더 좋았다.
오늘 오전에는 계획된 일정은 없었고 에스파냐 광장에 가기로 했다. 그전에 미리 찾아둔 라떼 맛집, UTOPIA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이른 아침에 나오니 관광객들보다 현지인들의 아침 시간이다. 바쁘게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교복을 입고 학교에 등교하는 아이들, 산책과 러닝 하는 사람들까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등교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부모가 학교까지 배웅한다. 나중에 일일투어 가이드한테 들었는데 아이들 납치에 대한 이슈 등이 있어서 학교 등하교는 부모가 케어하는 편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개들도 엄청 많았다. 어제만 해도 하나도 안 보이던 개들이 아침 산책 시간이 따로 있는 건지 거의 개반 사람반이다.
대형견들도 편하게 산책하는 풍경은 낯설지만 편안해 보였다. 물론 훈련이 잘 되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공원에선 목줄을 풀어놓고 뛰게 하지만 휙- 휘파람 불면 바로 주인한테 달려가더라. 개 무서워하는 울 엄마는 개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움찔거렸지만 개 좋아하는 나로선 이렇게 가까이 볼 기회가 많지 않아 개들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UTOPIA 카페 오픈 시간을 찾아보지도 않고 와서(J가 되려고 발버둥 쳤지만 어쩔 수 없는 P) 기다려야 했다. 카페 앞 공원에 앉아 세비야의 아침 풍경도 보고 사람 구경도 하고 저 위 2층 사무실에서 일하는 세비야 직장인들 구경도 했다. 넓은 사무실에 테이블이 파티션도 없이 학교와 똑같이 놓여 있었다. 보기만 해도 삭막해 보인다. 우리야 관광객 신분이라 여유롭지만 여기서 직장인으로 살게 되면 나도 똑같아지겠지.
스페인은 오전 출근하기 전에 가볍게 서서 마시고 가는 작은 카페들이 많다. 보통 에스프레소를 많이 마신다. 드디어 문을 연 이곳 역시 작은 카페고 앉아서 마실 곳은 없는 곳이다. 우리가 첫 손님일 줄 알았는데 외국인 2분이 이미 주문을 하고 있었다.
사이즈별로 주문할 수 있는데 나와 엄마는 작은 사이즈 라떼로 주문했다. 테이크아웃이라 공원에 가서 마셨는데 맛을 보고 후회했다. 큰 사이즈로 마실 걸. 한 잔에 2유로. 한 잔에 3,000원도 안 되는 돈이다. 말도 안 된다. 이렇게 맛있는 라떼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싸다니!
나로 말할 거 같으면 어떤 카페든 라떼만 마시는 라떼 신봉자다. 그래서 라떼만 마셔도 이 집 커피가 맛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편이다. 슬프게도 내 입에 맞는 라떼 맛을 내는 곳은 별로 없다. 그냥 마시는 거지.
근데 이곳 라떼 맛은 훌륭하다. 우유 맛이 너무 나거나 비리지도, 그렇다고 커피의 쓴맛이 많이 나거나 텁텁하지도 않고 우유의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커피의 맛을 감싸 안아 목구멍으로 황홀하게 넘어간다.
마치 의자왕과 삼천궁녀가 떨어진 낙화암처럼, 아니 이건 아니고... 심청이가 몸을 던진 인당수처럼, 아니 이것도 아니다. 암튼 목구멍으로 넘기는 게 아까워서 천천히 마셨다.
꼭 다시 오리라 마음먹었지만... 인생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그러니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
맛있는 커피도 마셨겠다 누에바 공원에 가서 트램을 타고 에스파냐 광장으로 향했다. 트램을 타려면 미리 현금을 준비해야 한다. 나는 미리 누에바 공원 매점에서 물을 사고 잔돈을 준비했다. 내가 다녀본 바로 누에바 공원 매점에서 파는 물이 가장 쌌다. 트램 티켓은 인당 2.8유로로 싸진 않다. 티켓 자판기는 정류장에 있어 구매하기 쉽다. 트램 안은 시원하다. 여름에 오면 트램은 꼭 타야 할 것 같다.
에스파냐 광장 근처에서 내리면 산 세바스티안 정원을 지나가야 에스파냐 광장으로 향할 수 있다. 이곳 정원도 꽤 넓고 좋아서 시간만 많으면 쉬었다 가고 싶더라.
세비야에서 가장 많이 보는 것은? 바로 말이다.
세비야에 내리면 처음으로 보는 것도 말이 끄는 마차이고 관광지에 가면 많이 보이는 것도 말이 끄는 마차일 정도로 말이 많다. 문제는 말똥이 거리에 굴러다니고 있어 냄새가 심하다는 것. 게다가 말들도 지칠만한 더위라 말들의 영혼도 다 어디론가 떠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탁 트인 에스파냐 광장이 눈에 들어오고 탄성이 절로 나온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눈이 부시다. 아침에는 그래도 많이 덥지 않아 다행이다. 이곳이 눈에 익숙한 분이라면 김태희의 핸드폰 광고를 기억하는 사림일 거다. 플라멩고 복장으로 이 광장에서 춤을 추며 했던 광고가 아직도 기억나는 데 이곳에 내가 오다니!
에스파냐 광장은 1929년에 건축가 아니발 곤살레스가 에스파냐·아메리카 박람회장으로 지은 곳으로 반달 모양의 광장을 둘러싼 건물이 있고 그 앞에 강이 흐른다. 여기까진 대충 찾아본 정보고 '스타워즈 클론의 습격'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는데 정말? 그 영화 분명히 봤는데 기억에 없다. 허허.
양쪽 첨탑 건물을 사이에 두고 가운데에 회랑도 있는데 태양을 피해 회랑을 거닐며 바라봐도 좋다. 세비야의 건물들을 보면 이슬람 양식(무데하르)과 유럽 고딕양식, 바로크 양식 등이 혼합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곳 에스파냐 광장도 마찬가지다.
가운데 반달 모양의 벽을 따라 모자이크 타일 장식으로 된 의자들이 쭉 이어져 있다. 48개의 의자엔 스페인의 각 주를 상징하고 있다고 하니 마음에 드는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어보자.
그냥 어딜 봐도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곳이라 다들 사진 찍기에 바쁘다. 하지만 나는 꽝손이라 건진 사진이 거의 없다. 나처럼 사진 찍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도 이런 곳에 오면 카메라 셔터 누르기 바빠진다. 간혹 사진 찍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소매치기들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니 조심해야 한다.
강을 따라 배를 탈 수도 있다. 시간이 많고 노 저어 줄 사람 있다면 여유롭게 광장을 한 바퀴 돌아도 좋을 것 같다.
에스파냐 광장의 강물을 따라 이어져 있는 파란색 난간의 문양도 아름답다. 참고로 강물엔 엄청 많은 물고기가 산다. 너무 많아서 징그럽더라. 허허.
에스파냐 광장에선 플라멩고 공연도 한다던데 은근 기대했지만 오전이라 그런지 관광객들만 많았다. 세비야에 와서 한국 관광객들을 이곳에서 가장 많이 본 것 같다.
황금의 탑까지 걸어가기로 하고 근처 공원을 거쳐 빠져나왔다. 공원에 공사하는 데가 많았다. 우리나라만 허구한 날 파헤치는 줄 알았는데 여기도 공원 관리는 수시로 하는구나. 시간이 없어 에스파냐 광장만 보고 가지만 근처에 많은 공원이 있으니 세비야에 오래 머문다면 공원 투어만 해도 좋을 것 같다. 바쁜 관광객은 이렇게 찍고만 다닐 수밖에 없구나.
엄마의 다리 상태 점검 후 잠시 고민했지만 천천히 과달비키르 강변을 따라 걸어가 보기로 했다. 강변을 따라 산책로가 잘 되어 있어서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는 사람도 많이 보였다. 여기 오니까 물론 한강이 훨씬 넓지만 한강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동네 산책로를 걷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생각보다 많이 걷는다 싶을 때 멀리서부터 조금씩 보이던 황금의 탑. 무슨 신기루 보는 사람처럼 가까워질 때까지 힘을 내서 걸었다.
드디어 만난 황금의 탑. 올라가면 작은 해양 박물관도 있다지만 입장료를 내야 하고 딱 봐도 계단을 올라가야 할 것 같아서 당연히 올라가진 않았다.
1220년 경에 지은 외부 방어탑으로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을 보관하며 외부를 금으로 칠했다고 황금의 탑이라 불렀던 기원이 있지만 정확하진 않고 여러 가지 기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뒤로 감옥, 저장고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여기까지 오니 엄마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택시를 탈까 하다가 한 정거장 밖에 안 되지만 근처에 있는 트램을 다시 탔다. 트램이 꽤 자주 오는 편이고 미리 트램 정류장을 알고 있으면 이럴 때 유용하다. 사실 도로에서 바로 택시 잡기가 쉽지 않아 보였고 택시 어플도 따로 등록을 안 해온 터라(어플 등록이 안 됐음. 왜 안 됐는지 아직도 모름) 웬만하면 걷거나 트램을 이용했다.
점심은 미리 예약해 둔 식당에 갈 참이었다. 유일하게 예약한 곳인데 거기서 내 식탐이 폭발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