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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Nov 04. 2023

배 터진 점심과 알카사르 미로 정원에서의 싸움

마이웨이 엄마와 꼴통 딸의 스페인 여행 9

                                                                                                    

세비야는 한낮의 태양이 너무 뜨겁기 때문에 골목마다 하얀 천으로 된 차양이 쳐져 있다. 정말 그늘만 찾게 되기 때문에 그늘이 없다면 낮에 돌아다니기도 힘들다. 

점심 식당 예약이 오후 1시 30분이라 시간이 꽤 남아서 대성당에서 멀지 않은 살바도르 성당에 가보기로 했다. 대성당 티켓에 포함된 터라 같은 날에 안 가도 예약증을 보여주면 바로 통과다. 대성당을 먼저 보고 온 터라 감흥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역시 화려하다. 이왕 갈 거면 살바도르 먼저 가고 대성당을 가는 것을 추천한다.

점심 예약을 해둔 식당은 대성당과 저녁에 갈 플라멩고 박물관의 중간쯤 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El Pinton'이라는 이름의 식당으로 홈페이지가 따로 있어 온라인 예약이 가능하다. 메뉴판도 올려져 있어 미리 메뉴를 보고 올 수 있다. 그동안 서버의 추천 메뉴에만 의존했지만 이번에야말로 밤늦게까지 메뉴를 숙지하고 왔다.(하하)


들어가면 예약하고 왔는지 묻고 안쪽으로 안내한다. 안에는 중정을 중심으로 좌석이 배치되어 있어 분위기가 꽤 근사하다. 우리나라처럼 에어컨이 잘 되어 있진 않지만 그래도 덥진 않아 다행이었다. 

독특한 식기류. 꽤 무거운데 지중해 식당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앉자마자 나는 끌라라, 엄마는 띤또 데 베라노를 시켰다. 끌라라는 스페인 맥주로 레몬을 섞어 만든 맥주다. 일반 맥주에 비해 술맛이 강하지 않고 달달하고 맛있다. 음료처럼 마실 수 있다길래 시켰는데 역시 맛있다. 스페인에는 술을 잘 못 마셔도 마실 수 있는 음료들이 다양하게 많으니 마셔보자.(물론 이마저도 후반에는 힘들어져서 못 마셨다...)

엘핀톤 세비체와 야키니쿠 소스를 곁들인 저온으로 익힌 이베리아 립
매콤한 토마토 소스를 곁들인 갈리시아 홍합과 이디아자발 리조또


메뉴를 너무 정독하고 왔던가. 생각보다 많이 시켰다. 주문을 하고 나서 두 사람한테 너무 많지 않냐고 물으니 쉐어할 거면 괜찮다고 하길래 그럴 줄만 알았지... 세상에 양이 너무 많았다. 보통은 2가지 메뉴만 시켜도 되는데 욕심을 부렸다. 홍합 좋아하는 데 결국 늦게 나온 홍합 요리는 조금 남겼다. 


홍합과 립은 어느 정도 아는 맛이라 인상적이진 않았는데 세비체와 리조또는 의외로 맛있었다! 그중에서도 저 리조또는 왜 사람들이 다 먹어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리조또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서 망설이다가 시켰는데 엄마랑 난 의외로 맛있어서 다 먹었다. 근데 약간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약간 독특한 맛이 났는데 그게 고소하면서 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내가 쓴 연재 요리 브런치를 보면 알겠지만 미각이 없어서 맛 표현도 잘 못하겠다;;) 암튼 우리한테는 맛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배가 불렀는데 살짝 민망했다. 왜냐면 바로 옆 테이블 외국인들은 와인 한 잔에 간단한 요리를 시켜 여유롭게 대화하면서 먹던데 우리 테이블엔 커다란 접시가 무려 4개나 놓여 있고 먹느라 바쁘기만 했다. 접시가 사진으로는 크게 안 보이지만 정말 크다. 4개 한꺼번에 놨으면 다 못 놓을 뻔했다. 허허.

배도 꺼뜨릴 겸 오후엔 알카사르 예약을 해놔서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드디어 플라멩고 거리공연도 보게 됐다. 전문적인 댄서라는 느낌은 없었지만 날도 더운데 열심히 춰서 나름 공연비도 지불했다.


근데 딱 여기까지만 좋았다. 알카사르 입구 찾는 게 그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대부분 관광지들은 구글 맵으로 찍고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어서 저기도 그럴 줄 알았지. 건너편으로 가서 한참 걸어가고 있는데 이상한 곳이 나와서 당황했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다시 건너와 물어볼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경황이 없어 거리 가판대 옆에서 뭔가를 홍보하고 있는 분들한테 물었다. 너무 친절하던데 알고 보니 JW라 표시되어 있는 현지 여호와 증인들이었다. 아... 이분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있구나. 세비야에서 여호와 증인들을 만날 줄이야. 물론 길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서 홍보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하.


문제는 그렇게 찾아간 막다른 골목에 알카사르가 아닌 '알카사르 호텔'이 기다리고 있었단 거다. 결국 호텔에 들어가 물어보고서야 알카사르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솔직히 알카사르 이름 붙인 게 너무 많다. 길치 방치인 나만 그렇게 느낀 거겠지.  

알카사르 입구는 이곳이다. 깃발 꽂은 핑크색 벽이 있는 성이 보인다면 다 온 것이다. 어이없게 헤매고 다녀서 들어가기 전에 당충전 하려고 젤라또라도 먹으려고 했지만 엄마가 먹지 않겠단다. 혼자 먹기도 애매해서 예약 시간보다 일찍 오긴 했지만 줄 서서 들어갔다. 엄마는 이때부터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가 지쳤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애써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대성당도 건성으로 보고 나왔는데 알카사르 마저 그렇게 보고 나올 수 없었다. 그렇다. 이게 다 내 욕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게 화근이 되었지.

들어가서야 알았는데 알카사르 관람은 실내가 아닌 대부분 실외에서 이뤄진다. 생각보다 넓고 방들도 많고 사람은 더 많다. 오후지만 아직 태양이 가장 뜨거운 시간. 야외 관람은 우리한테 오히려 독이 되었다. 


알카사르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으며 이슬람이 지배하던 시기에 지어진 이슬람 양식의 성이다. 이슬람 건축 양식인 무데하르 양식의 끝판왕이며 궁 안의 내부 방들은 알함브라 스타일의 화려한 양식으로 가득하다.   

어쨌든 이왕 왔으니 천천히 다니면서 구경하면 되겠지 생각했다. 가이드 책에서 주워들은 것을 얘기하랴, 지도를 보며 순서대로 찾아가느라 사실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지 방에 들어가도 사진 찍을 각도 하나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얘기해도 별로 듣지도 않고 앞장서 묵묵히 걷기만 한다. 사진을 찍자고 멈춰 세우면 그때뿐, 이미 아무런 감흥도 찾아볼 수가 없다.  

순서대로 방을 찾아다니는 의미도 없어졌다. 왜냐면 엄마가 2층에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도 힘들다 해서 처음에만 나 혼자 올라갔다오고 그다음부터는 나도 안 올라갔다. 슬슬 알카사르 관람이 망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또다시 1시간 컷으로 나가야겠구나.

이 와중에 공사하는 구간도 있어서 어떻게 해도 똥손인 나는 쇠파이프 안 나오게는 못 찍겠더라. 

창문에 나 있는 문양조차 대칭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벽에도 전혀 다른 패턴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방마다 천장에 저런 정교한 패턴들이 하나 가득이라 목이 빠져라 올려다보고 다녔다. 화려함과 정교함의 극치다. 패턴 디자이너들이 오면 상당히 좋아할 것 같다. 솔직히 엄마 때문에 마음이 급해져서 거의 보이는 방만 들어가서 훑어보고 바로 나왔다. 지금 보니 어디가 어딘지도 알 수 없다. 

유일하게 조금 시원했던 곳이던가? 지하에 있던 목욕탕이다. 이때부터 서로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애증의 분수대... 결국 이 앞에서 싸움이 났지. 방을 대충 구경하고 정원으로 나왔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했었는데 엄마는 힘든데 내색 안 하고 따라다니느라 지쳤고 나는 내가 준비한 여행을 다 못하고 가는 것 같아 속상한 마음에 몇 마디 투덜거렸다. 


갑자기 엄마가 소리를 빽 지르고 화를 버럭 냈다. 이럴 줄 모르고 데리고 왔냐면서 힘든데도 일부러 내색 안 하고 따라다니는 데, 너는 말도 안 하고 뚱하게 있으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면서 정색하는 바람에 나도 충격받았다. 


그동안 서로 힘들었던 것들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보건 말건 별로 상관도 없었다. 그래도 큰 소리는 낼 수 없어 마침 바로 옆에 있던 미로 정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람들은 미로 정원에는 따로 들어오지 않는지 우리 밖에 없어서 엄마랑 나랑 여기서 소리 지르면서 싸웠다. 엄마는 이럴 거면 여행 다 그만두고 가자. 나는 엄마가 힘들면 힘들다고 해야 알지 어떻게 내가 다 아느냐, 나도 엄마 위해서 준비한 여행인데 다 못하고 가니까 속상해서 그런 거다. 엄마는 원래 오래 못 걷고 힘들다고 어제오늘 몸이 다르다고 말하지 않았냐, 이럴 줄 모르고 온 것도 아니고 내가 몸이 힘들어서 그런 걸 어쩌라는 거냐. 나는 그래도 그렇게 갑자기 화를 내면 서운하다, 어떻게 그렇게 화를 낼 수가 있냐, 나만 좋자고 여기 온 거냐. 엄마는 네가 가고 싶으니까 내 핑계 대고 온 거지 않냐. 

끝도 없는 미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답도 없는 분노의 말들이 공중에 흩어졌다. 미로 정원이 넓지 않아서 들어갔던 건데 화를 내면서 가자니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했다. 가도 가도 입구가 나오지 않아 당황했다. 


미로 정원의 입구를 찾아 나왔을 때, 엄마한테 사과했다. 내가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했다. 엄마 컨디션 생각해서 일정을 짰어야 했는데 오후 4시 넘으면 시원해질 줄 알았는데 이렇게 더울 줄 몰랐다. 내 딴에는 일정을 느슨하게 짠 거였다. 엄마가 시차 적응에 실패하고 오후 3~4시만 넘으면 못 걷고 힘들어할 줄 몰랐다. 지금이라도 빨리 나가자고 했다.


이놈의 알카사르 야외 정원은 왜 이렇게 넓은지 출구 찾는데도 한참 걸렸다. 출구에서 나와 걷는데 엄마가 갑자기 화장실에 가야겠단다. 급하다고 해서 다시 출구로 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예약증을 보여준 후 들어갈 수 있었다. 다행히 출구 근처에 화장실이 있어 망정이지, 하마터면 엄마는...(생략하겠다)


한참을 화장실에서 나오질 않아 걱정이 되었다. 왜냐면 예전에도 설사하다가 화장실에서 혼절한 적이 있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미친년이지. 왜 이렇게 더운 날 걷게 만들었을까. 더위 먹은 거 아닌가. 또 화장실에서 쓰러지면 어쩌지. 여긴 한국도 아닌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무슨 깡으로 여길 끌고 온 거냐. 이게 다 정말 엄말 위해서였어? 아니잖아...


하도 나오지 않아 화장실에 들어가 엄마를 불렀다. 대답을 하는 걸 보니 괜찮은 것 같다. 20분은 있었나. 엄마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나왔다. 물 사서 마시게 하고 앉아서 쉬게 했다.  

내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그때도 집에 나 혼자 있을 때 엄마가 혼절해서 119를 불렀던 터라 트라우마가 있다. 한동안 엄마 방 가서 숨 쉬는지 확인하고 그랬었다. 엄마가 날 안심 시키느라 괜찮다고 했다. 저녁에 있는 공연은 보지 말고 숙소 가자고 했더니 괜찮단다. 내가 진이 다 빠져서 무조건 호텔 들어가자고 했더니 싫단다.


하아, 우리 엄마 고집을 누가 말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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