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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Mar 13. 2017

술(酒)에 취한 날들.

술의 역사(歷史)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술은 어른에게 배우랬다고 처음 술을 입에 댄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였다. 여름방학 때 몇몇 반이 모여서 학교 운동장에서 1박 2일 캠프를 지냈다. 담임 선생님이었던 한문 선생님은 의외로 쿨하게 우리에게 캔 맥주를 따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 말을 했었다.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하니, 니들이 막는다고 안 마실 것도 아니고 이왕이면 나한테 배우라는 말이었다. 캔 맥주 하나에 술이 굉장히 쓰고 달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또 하나의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 술을 마시면 바닥이 나한테 올라온다는 사실이었다. 화장실에 가서 화장실 바닥이 싸울 듯이 나한테 올라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선 휘적휘적 갈지자걸음으로 이 사실을 알리고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나는 굉장히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는데 이날 취해서 평소 흠모하던 국어 선생님한테 가서 춤도 췄으니 다른 사실도 덤으로 깨달았는데 술은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굉장하구나!


선생님의 니들이 막는다고 안 마실 것도 아니라는 말은 사실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았다. 1학년 때 음성 서클(학교에서 인가해주지 않은 비인가 서클)이었던 연극반을 친구 따라 들었다가 동네 남자 학교 아이들과 어울리거나 어른처럼 카페를 들락거리거나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른 선배들과 어울리는 것을 알았을 때 겁이 나서 그만두었던 나였다. 큰일 날 줄 알고 그만두었으니 그런 내가 학교 다닐 때 술을 마시고 다녔을 리 만무하다. 수학여행 때 몇몇 친구들은 술을 숨겨와서 마시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그러니 술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가면서였다. 그때는 평생 마실 술을 한 번에 마시고 죽겠다는 각오로 허구한 날 술자리를 가졌고 디자인 학과였던 터라 나중에는 아예 컴퓨터를 가져다 놓고 집에도 가지 않았다. 집에는 졸업작품 때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밤새도록 술 마시고 학과에서 퍼져 있기 일쑤였다. 그때 유행했던 것이 과일주였다. 소주도 자주 마셨지만 달달한 과일주를 좋아했다. 문제는 과일주가 한순간에 간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대학 친구들 사이에 회자화가 될 몇가지 사건들을 터뜨리고 난 후에는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시지 않는다. 나의 20대 술은 술이 아니라 말 그대로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도구에 불과했다. 빨리 마시고 취한다가 모토였다고나 할까. 동동주나 막걸리까지는 좋았지만 노래방에서 마시던 싸구려 양주는 최악이었다. 술을 마시고 처음으로 고백을 받았고 술을 마시고 처음으로 첫 키스의 추억을 가졌지만 날카롭지 않았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저 멀리멀리로. 그 느낌은 축축했다. 내가 좋아하던 노래는 '취중진담'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서는 친구들보다 회사 사람들과 마시게 되었다. '회식'이라는 문화였다. 첫 회사는 디자인실만 따로 떨어져 나와 있었지만 여자 직원만 10명이었고 그만큼 기강이 셌다. 여고의 연계 선상이었달까. 옥상으로 불려 올라가기도 했고 눈물도 쏙 뺐지만 그만큼 화끈했다. 거칠 것이 없으니 언제나 회식자리에선 너구리 굴처럼 언니들이 줄담배를 피워댔고 근무 시간에도 불려 나가 노래방을 가거나 술을 마시는 일이 종종 있었다. 회사 단체 회식이 더 골 때렸는데 가장 어리고 핫한 신입들이라는 이유로 가라오케 가면 꼭 탬버린으로 장단을 맞추거나 신입들이 꼭 한곡씩 분위기를 맞춰야 했다. 그 안에서 마시는 술이란 편하지 않았고 몸을 사리게 되었다. 소맥을 한두 잔 하거나 분위기 맞춰 잔을 적당히 빼돌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나이가 들면서는 이런 눈치도 안 보게 되었지만 어쨌든 사회생활 초반 술자리는 내게 꽤나 곤역스러운 일이었다. 노래 좀 시키지뫄!!!


30대에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다. 종교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사실 술이라면 진력이 났다. 술 마시고 가장 좋았던 기억이라곤 친구와 집에서 술 마시면서 함박눈이 펑펑 내려 아무도 없는 새벽 산책을 즐긴 게 다일만큼 좋았던 기억이 별로 없었다. 옮겨간 회사들도 전반적으로 강요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자연스럽게 술자리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지금은 맥주를 마신다. 맥주란 어떤 술인가. 빨리 마시고 취해야 하는 나에겐 걸림돌이었던 술이었다. 배만 불러서 화장실만 자주 가게 만들고 하나도 취하지 않는 술. 그게 내게 있어 맥주였다. 거들떠도 안 보던 그 술을 비로소 즐기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맥주가 있는 줄 몰랐다. 우리나라에도 다양한 크래프트 비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맥주라면 하이트와 카쓰가 전부인 줄 알았던 내게 놀라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맥주를 즐기니 마트가 달리 보이고 한정판 비어 컵이 딸려 있는 프로모션이라도 있을라치면 엄마의 등짝 스매싱에도 아랑곳없이 낑낑거리며 카트에 담기 바빠졌다. 심지어 여행에서도 예전이라면 절대 사 오지 않았을 맥주컵을 사 왔다. 전용잔만 봐도 배부르고 주말 밤 영화를 보며 마시는 맥주야말로 꿀맛이다. 뒷베란다에 쟁여둔 맥주 박스만 해도 어느새 두 박스가 되었다. 라거만 맥주라 생각했었는데 좋아하기 시작하니 에일맥주의 세계도 열렸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에일맥주의 향긋한 맛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그거 아는가? 달콤한 과일 맛이 나는 에일맥주 마시면 다음날 똥에서도 과일향기가 난다. 진짜다.


어쩌자고 술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비염과 코 때문에 지금은 잘 마시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도 맥주는 내게 좋은 친구였고 위로자였다. 각자만의 술에 대한 역사가 있을 것이다. 즐거웠던 기억도 잊고 싶었던 기억도 있을 터. 어떤 이유로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을 수도 아니면 처음부터 술 자체를 입에 대지도 않을 수도 있다. 어떤 게 좋은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선택하라면 나는 술을 마시는 쪽일 게다. 그게 나다. 적당한 술은 나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예전에는 분위기 때문에 마신다 했지만 생각해보면 술을 마시고 이완되는 나를 즐기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예민하고 긴장감 때문에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나의 가면을 조금이라도 벗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함께 마시는 술도 좋지만 혼자 마시는 술도 좋다. 당신의 눈 속에 들여다 보이는 당신에게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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