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휴가는 진짜 꿀이었다.
첫 번째 출산 후였을 것이다. 심천에서 상하이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몇 번의 인터뷰를 하면서, 뭐 하러 가냐, 여기 남으면 더 좋은데, 가지 말라고 제너럴 매니저가 붙잡았다. 그래도 이미 상하이 측 제너럴 매니저와 이야기가 되었고, 진행하면 되는 것이라 절차를 진행했다. 전화로 상하이 측 HR과 연봉 협상을 하고, 인터넷으로 상하이 교민 커뮤니티에 보모를 구한다고 글을 올렸다. 상하이 호텔에 머물면서 일을 시작하고 일 끝나고는 집을 구하러 다녔다.
갓난쟁이는 한국에 맡기고 이사를 진행하고, 급히 구한 집에서는 박스도 풀지 못한 채,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때, 남편은 여전히 심천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1~2개월 간은 나 혼자 차갑고 어두운 집에 혼자 돌아오면 이삿짐 박스는 거실에 쌓여 있었다. 글로 쓰니 좀 쓸쓸하고 힘겨워 보이지만, 그때는 즐거웠던 것 같다. 아니면 그냥 바빴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좋은 분을 만나서 아줌마를 인계 받았다. 심지어 그분이 인터넷에 내가 쓴 글을 보고, 다른 친구가 달라는 것을 나를 기다려줬다고 했다. 아마 갓난쟁이를 데리고 일해야 하는 내가 딱해 보였던 것 같다. 지금도 그때 만난 아줌마가 내가 일하는 동안, 아이들을 돌봐주고, 집안일을 도와주신다.
같은 회사지만 다른 사업부에 새로운 제품에 글로벌 마켓을 맡는 일이어서 적응이 필요했을 것 같다. 하지만 적응이랄 것도 없이 신나게 일을 하고, 집에 와서는 갓난아기를 돌보았다. 심천에서는 모유수유를 하면서, 매 모유 수유 시간마다 집으로 신나게 달려가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돌아왔다. 다시 한국에서 데려온 아기에게 젖을 물렸더니, 젖이 떨어져라 꽉 깨물었다. 그때, 이러다 내가 죽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분유를 먹이기 시작했다.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젖병을 깨물고 빨던 힘이 아주 세진 것 같았다. 그렇고 첫 번째 출산과 새로운 도시에서 일을 시작했다.
두 번째 출산은 그로부터 4년 후였다. 첫 번째 출산의 경험과 둘째는 엄청 낳기 쉽다는 엄마의 확신에 엄청 가볍게 생각했다. 의례히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에 맞춰서 늦게 늦게 출산을 준비하러 한국으로 갔다. 그리고 출산 후, 바로 코비드 19가 터졌다. 한국에서 뒹굴거리며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면서 아쿠아핏, 줌바 수업이나 다니던 출산휴가는 정말 꿀이었다.
휴가가 점점 끝나갈 무렵, 우리 매니저는 나를 다른 팀으로 보낼 준비를 했고, 조직 개편에 맞춰서 다른 역할을 추천했다. 몇 번의 인터뷰를 보고, 준비를 하던 중, 중국이 비자 발급을 중단했다. 다행히 내 비자는 살아있어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아가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승진하면서 다른 팀으로 간다는 시나리오는 무산되었고, 다른 제품 라인에 낮은 자리에 오퍼가 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 커리어는 망했나. 아이도 데려오지 못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입장이 좀 처량했다. 다행히 조금 시간이 지나서, 2명이 내 밑으로 왔고, 나도 내 영역을 넓혀나갔다. 아기는 6개월이 지나서 데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팀 전체의 전략을 짜고 있으니, 내가 스스로 내 영역을 넓히고 또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끌어올린 것 같다. 그리고 나를 믿어주는 팀원과 몇 번의 best employee, best project를 수상했다. 그냥 걱실걱실하게 주어지는 태스크와 프로젝트를 성공시켰고, 다른 팀원들의 성장을 돕다 보니, 나 자신도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두 번의 출산 휴가를 거치면서, 회사에서의 내 자리를 만들어가며 무시무시한 상하이의 covid19 락다운을 견뎌나갔다. 뒤돌아보니 어려운 일들을 잘 헤쳐나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둘러 자전거 페달을 돌리며 퇴근한 나를, 그리고 허술한 엄마 밑에서 멋지게 성장한 아이들을 안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