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페터 한트케의 중편소설.
굉장히 특이한 소설이다. 신국판 120페이지의 얇은 중편소설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소설이다. 문장은 기존의 문법, 어법, 구성을 뒤엎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아마 지금까지도 이런 방식의 소설은 희귀하지 않을까 싶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느낌인지 읽으면 30분 만에 바로 알게 된다.
문장이 무척 건조하고 짧다. 짧아서 건조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문체가 그런 문체인지 모르겠다. 묘사보다는 단순한 서술이 많아서 그런 것 인지도 모르겠다. 상황을 묘사하는 부분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묘사라기보다는 현상을 설명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속도가 빠르다. 문장도 짧고 속도가 빨라서 사건의 전개도 빠르게 진행된다.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더 집중하며 읽어야 하는 이유다.
주인공 블로흐는 과거 축구 선수로 실제 골키퍼 출신이다. 그는 갑자기 혼자만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일터에서 잘렸다고 생각해서 길거리를 방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가게에 가서 주문을 하고, 싸움에 휘말리는 등 길거리를 방황하며 벌어지는 모든 사건에서 무시당한다.
갑작스럽게 만나는 게르다라는 여성과의 만남.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고 불쾌한 기분을 받았다는 이유로 갑자기 살인을 저지른다. 이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 혹은 현실들이 나열되고 반복된다. 그는 계속 스스로 잠을 깨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에 의해 잠에서 깬다.
블로흐는 계속 주변 사람과 의사소통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문장을 이해하기 어려워하고, 단어를 다른 단어와 혼동한다. 특히 다음 구절이 그런 블로흐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중얼중얼 이야기를 했다. 블로흐에게는 그 소리가 마치 외국영화에서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번역하지 못한 부분처럼 들렸다.’
블로흐는 전처 헤르타도 찾아가서 만난다. 블로흐는 신문 기사를 자주 읽지만 사실 상황 파악을 잘하지 못한다. 살인사건에 대해 다루는 기사를 읽거나 관련 이야기를 전해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두 번째부터 숫자를 파악하려는 강박증도 생기고, 물건의 가격을 알고 싶어 하는 강박증도 생긴다.
물가의 곤충을 관찰하는 고도의 집중력이 있으면서도 빠르게 지나치는 상황들은 파악하지 못한다. 그 밖에 보이는 것들, 들리는 것들에는 무척 예민하지만 좁혀지는 수사망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리고 블로흐는 고민하고 있는 낱말들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 반복해서 고민한다. 하지만 더 나은 고민을 하지는 못한다. 혹은 더 나은 고민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중이라서 읽는 이의 마음이 안타깝다.
블로흐는 때로는 강박증으로 때로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느끼며 주의력 결핍과 행동과잉 장애도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면서 오지랖도 부리고 고집도 부린다. 게다가 소시오패스 같기도 하고 사이코패스 같기도 하다. 한마디로 굉장히 다중적으로 복잡한 인물이다. 작가 페터 한트케는 이러한 주인공 인물의 다중적인 모습을 굉장히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만들었다. 마치 진짜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가 느끼는 불안을 다채로운 상황을 만들어 묘사했다. 그 불안감이 갖고 있는 다양한 감정 또한 실질적으로 그려냈다. 우리는 누구나 약간의 정신적 장애를 갖고 산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다양한 정신 장애의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는 밀도 있는 소설이다.
좋았던 부분 :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가격을 알고 싶어 하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다. 어떤 식료품 가게의 유리창에 새로 들어온 물건들의 품목과 가격이 흰색으로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게 앞에 있는 과일 진열대의 가격표는 넘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바로 세웠다. 그 움직임 때문에 누군가가 안에서 나와 그에게 무엇을 살 거냐고 물었다. 다른 가게에는 흔들이 안락의자에 긴 옷이 멋스럽게 걸려 있었다. 핀으로 꽂아 놓은 가격 쪽지는 의자 위에 걸린 옷 옆에 놓여 있었다. 블로흐는 그것이 의자의 가격인지 아니면 옷의 가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비매품일 테니까!
-. 블로흐의 강박증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가격에 대한 궁금증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테지만 구체적으로 묘사한 점이 탁월하다. 저 단락부터 블로흐의 병적인 강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는 사건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자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벽에 걸려 있는 가지 뿔이나 구부러진 뿔을 바라보면서 마치 공중촬영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소음들이 마치 라디오에서 예배 의식을 중계할 때의 기침 소리나 헛기침 같은 잡음처럼 들려왔다.
-. 사실은 블로흐와 모두 관련이 있는 일들조차도 관련이 없는 것처럼 의식하기 시작한다. 더불어 시각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도, 청각적으로 들리는 소리도 모두 그에게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그에게 우체국이 사실상 ‘더 이상 통화할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좋지 못한 농담을 하는 곳으로, 그전부터 극도로 싫어했던, 스포츠 기자들이 말장난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집시에 관한 우편배달부의 이야기도 그에게는 이미 서투른 말장난으로, 부적당한 암시로 여겨졌다. 마찬가지로 축하 전보도 단어들은 유창했지만 실제로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야기된 것만 암시가 아니라, 주위의 대상들도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 다음 단락에 계속 서술되어 있지만 이후로 블로흐는 모든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심지어 모든 단어를 의심하고, 문장을 의심한다. 그리고 스스로 다른 의미로 변형해서 판단한다. 극도의 불안이 만들 수 있는 무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