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by 부소유

은지는 새로운 직장에서 3년째 일하고 있었다. 첫 회사에서의 성희롱 재판에서 승소한 후 찾은 중견기업이었다. 처음에는 희망적이었다. 여성 임원도 있었고, 복지도 괜찮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리천장은 여전히 단단했고, 차별은 더 교묘해졌다.


그날도 평범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은지는 기획팀 차장으로 승진한 지 6개월째였다. 스물여덟 살에 차장이 된 것은 이례적이었다. 실력으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회의실에서 임원들은 은지를 ‘김 양’이라고 불렀다. 차장이 아니라 양. 그 한 글자가 은지의 위치를 규정했다. 오전 회의에서 은지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6개월간 준비한 디지털 전환 프로젝트였다. 발표를 마치자 전무가 말했다. - 김 양, 이거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야? 여자들은 항상 감성적으로 접근하는데. 은지가 - 데이터 기반으로 분석한 결과입니다, 하자 전무는 코웃음을 쳤다. - 데이터도 해석하기 나름이지.


점심시간, 동료들과 식사를 하던 중 인사팀장이 다가왔다. - 김 차장, 결혼 계획 있어요? 은지가 - 아직 없습니다, 하자 팀장이 - 서른 되기 전에는 해야지. 회사에서도 기혼자를 선호하거든. 안정적이라고. 은지는 밥이 목에 걸렸다. 결혼이 승진 조건이란 말인가. 오후에 은지는 부장에게 호출을 받았다. - 김 차장, 이번 프로젝트는 박 과장이 맡기로 했어. 은지가 놀라 - 제가 6개월간 준비한 건데요, 하자 부장이 - 박 과장이 남자라 대외 협상에 유리해. 김 차장은 보조 역할을 해줘. 은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또다시 자신의 노력이 남자 동료에게 넘어갔다.


퇴근 시간, 은지는 야근을 하고 있었다. 박 과장에게 넘겨줄 자료를 정리하면서 허탈함을 느꼈다. 컴퓨터 화면에 사직서 양식을 띄워놓고 한참을 바라봤다. 이직을 해도 달라질까. 어디를 가도 비슷하지 않을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천장 아래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출판사 편집자였다. - 김은지 작가님이시죠? 원고 검토했습니다. 출간하고 싶습니다. 은지는 놀랐다. 취미로 쓴 에세이를 투고한 것이 채택된 것이다. 제목은 ‘반지하의 빛’. 자신의 성장기를 담담하게 쓴 글이었다.


일주일 후, 은지는 결심했다. 사직서를 제출했다. 부장이 놀라며 - 왜 그만두려고? 어렵게 차장 됐는데. 은지가 - 다른 길을 가보려고요, 하자 부장이 - 여자가 너무 욕심부리면 안 돼. 안정적인 게 최고야. 은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설득당하고 싶지 않았다. 인사팀에서는 퇴사 면담을 했다. - 퇴사 이유가 뭐예요? 은지가 -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하자 담당자가 - 혹시 결혼 때문이에요? 여자들은 보통 그래서 그만두던데. 은지는 웃었다. 씁쓸한 웃음이었다. 끝까지 여자는 결혼과 연결시키는구나.


마지막 출근 날, 은지는 책상을 정리했다. 3년간 쌓인 서류와 물건들. 그중에서 중요한 것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버렸다. 노트북을 반납하면서 은지는 홀가분함을 느꼈다. 더 이상 이곳에 묶여 있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 동료들이 작은 송별회를 열어줬다. - 김 차장, 아깝다. 능력 있는데. 한 여직원이 조용히 다가와 - 부럽다. 나도 나가고 싶은데 용기가 없어, 하고 속삭였다. 은지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 언젠가 기회가 올 거예요.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은지는 가벼웠다. 월급은 없어졌지만 자유는 생겼다. 불안하지만 설렜다. 스물여덟, 다시 시작하기에 늦지 않은 나이였다. 아니, 오히려 적절한 시기일지도 모른다.


부모님께 퇴사 소식을 전했다.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 괜찮겠니? 하고 물었다. 은지가 - 글 쓰면서 살아보려고요. 책도 나오고요. 아버지가 - 우리 은지가 작가가 되는구나, 하며 뿌듯해했다. 부모님의 지지가 은지에게 힘이 되었다. 민수가 - 누나, 멋있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거, 하고 말했다. 대학생이 된 동생은 누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민수는 공대생이었지만 누나의 글쓰기를 응원했다. - 누나 책 나오면 내가 백 권 살게. 준호도 전화를 했다. - 퇴사했다며? 대단해. 나도 용기 있게 살고 싶어. 카페 매니저가 된 준호는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지만, 은지의 도전을 부러워했다.


은지는 작은 원룸을 작업실로 구했다. 반지하가 아닌 3층이었다. 창문으로 햇빛이 가득 들어왔다. 책상과 의자, 노트북이 전부인 공간이었지만 은지에게는 충분했다. 자신만의 공간, 자신만의 시간.


첫 번째 책 출간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선인세는 백만 원. 많지 않은 돈이었지만 시작이었다. 은지는 계약서를 보며 생각했다. 이제 진짜 내 이름으로 살 수 있구나. 김 양도, 김 차장도 아닌, 작가 김은지로.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썼다. 할머니의 차별, 반지하의 기억, 직장에서의 차별, 가족의 이야기. 모든 것이 글감이 되었다. 고통스러웠던 기억도 글이 되니 의미가 생겼다. 은지는 깨달았다. 자신이 반지하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반지하를 품고 간다는 것을. 그 경험이 자신을 만들었고, 이제는 그것을 쓸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것을. 상처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책이 되는 과정.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 초판 3천 부로 시작합시다. 반응 좋으면 증쇄할게요. 은지는 설렜다. 3천 명이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다니. 반지하의 이야기가 세상으로 나간다니. 원고 마감을 앞두고 은지는 마지막 문장을 썼다. ‘반지하에도 빛은 든다. 작고 희미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 빛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지상에 설 수 있다. 아니, 이미 서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


탈고한 날, 은지는 한강을 걸었다. 봄바람이 불었다. 따뜻했다. 회사원도 아니고 백수도 아닌, 작가라는 정체성을 가진 첫날. 불안하지만 자유로운, 가난하지만 충만한 그런 삶의 시작이었다.


오늘 나는 진짜 퇴사했다. 안정을 버리고 자유를 선택했다. 월급을 버리고 글쓰기를 선택했다.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도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다. 이제 나는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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