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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스카라 Oct 17. 2024

부부의 여행법-프롤로그

남편이 쓰고 아내가 그리는 여행의 기억

여행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어째서 사람들은 여행은 좋아할까요 (일본 나오시마)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일 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낼 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 설레게 하는 것.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멜로가 체질>이 나오기 전까지 한국 최고의 연애 드라마였던 <연애시대>에서 동진의 내레이션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연애에 관한 이보다 적확한 정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연애의 정의는 여행의 정의에도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우리는 왜 여행을 좋아할까요? 우리는 왜 떠나야만 할까요?


 오늘이 조금 힘겹더라도, 내일이 가슴 설레는 몇 안 되는 이유. 여행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입니다.




여행자가 부부가 된다는 것의 의미


 늘 혼자 여행하길 즐겼습니다. 외로움을 덜 느끼는 유전자를 타고났기도 했지만, 혼자서 여행할 때만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믿었거든요. 동행이 없다 보니 말하기보다 생각하게 되고, 어쩔 땐 개똥철학 같은 걸 깨우치는 착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2인분부터 주문이 가능한 음식을 못 먹는 것만 빼면) 혼자 하는 여행이 가진 장점 또한 많습니다. 혼자 하는 여행은 민첩하고 효율적입니다. 출국 전 구엘 공원과 사그라다 파밀리아 중에 어디를 마지막으로 갈지 논쟁할 필요도 없고, 도미토리 2층 침대의 아랫 자리는 누가 차지할지 눈치 볼 필요도 없으며, 울퉁불퉁한 포르투 거리를 10km 넘게 걷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비행기 한 붓 그리기로 혼자서 지구를 두 바퀴쯤 돌았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여행자의 결혼식은 이제 더 이상 혼자서 여행하지 않겠노라 모두에게 맹세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신랑 OOO은 앞으로 모든 여행은 아내와 함께하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묘한 불편함이 밀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는데 당연히 즐거워야 하는 게 아닌가 싶겠지만, 둘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자동차도 골프도 좋아하지만, 박스터에 골프백 2개를 싣고 떠날 순 없는 것처럼요.


결혼은 앞으로 영원히 함께 여행할 것임을 약속하는 자리입니다 (영국 런던)


함께하는 여행에 대한 두려움


 평생을 함께해도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면, 같이 여행을 떠나보세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정각에 도착해야 할 버스가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을 때 상대의 표정을 살펴보세요. 예보에 없던 폭우로 아끼는 코듀로이 재킷이 젖었을 때 어떤 말을 하는지 지켜보세요. 호텔에 여권을 두고 나와 매장에서 텍스리펀을 받지 못할 때 누구를 탓하는지 살펴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평소라면 그냥 넘길 일도 들어줄 사람이 옆에 있다는 이유로 불만을 쏟아내곤 합니다.


 함께하는 여행은 행복이 배가 되기도 하지만, 짜증 역시 배가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행복은 반으로 줄어도 행복이지만, 짜증은 배로 늘면 재앙이 된다는 겁니다. 혼자 여행하길 즐기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그런 위험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상대를 상처 입히거나, 상대 역시 나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혼자서 떠납니다.


쟤들 같이 여행 가더니 벌써 싸워?


혼자 행복한 여행 vs. 함께 행복한 여행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엔 위험하지만 꼭 거쳐야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국세청에서 보낸 우편물을 확인하거나, 공중화장실의 변기 뚜껑을 들어 올릴 때가 그렇습니다. 제겐 첫 번째 부부 여행이 그랬습니다. 기적적으로 은폐에 성공한 서로의 괴팍함이 여행을 통해 드러나는 건 아닐까 염려됐습니다.


 걱정과 달리 아내는 최고의 여행 파트너였습니다. 아내는 하루 2만 보 정도는 거뜬히 걸을 만큼 건강했고, 하루 7잔 이상의 커피를 마셔도 괜찮았으며, 건축물을 배경으로 한 우리 사진보다 우리가 찍은 건축물 사진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아내에겐 놀라운 능력이 있었습니다. 여행 중에 그녀는 아코디언처럼 펼쳐지는 작은 몰스킨 노트에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얼핏 봐도 예사 실력이 아니었습니다. 한 번은 아내가 맛있게 먹은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를 즉석에서 그려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울듯이 감동한 셰프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평생 혼자만 행복한 여행을 해온 제게, 아내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여행을 가르쳐 줬습니다.


이런 선물을 받으면 셰프들은 정말 행복해합니다 (일본 교토)


지나간 여행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


 세상에 똑같은 여행은 없습니다. 같은 여행지를 다시 찾더라도, 여행을 떠날 때의 나이가 다르고, 그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여행에서 느끼는 감정의 결이 다릅니다. 언제든 여행은 다시 떠날 순 있지만, 흘러간 여행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지나간 여행을 기억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아내의 노트가 가장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은 여행이 끝난 후였습니다. 노트는 동영상이나 사진으로는 결코 재현할 수 없는 여행의 기억을 생생히 소환해 냈습니다. 그림에는 '우리가 저기에 있었지'를 넘어 '우리가 저기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지'가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아내의 파스타 그림에서 비릿한 엔초비 냄새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아내의 그림은 어떤 사진보다 강렬하게 여행의 기억을 소환해 냅니다 (일본 오사카)


부부의 여행법


 하나 아쉬운 점은, 그림만으로는 여행의 디테일을 충분히 기억해 내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저 동네 산책할 때 정말 좋았지, 근데 저때가 정확히 언제였지?'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남편이 쓰고 아내가 그리는 여행의 기억, 지나가버린 여행을 더 잘 기억해 내기 위한 그림일기. 어느 부부의 여행법입니다.


 부부의 여행기엔 높은 확률로 여행의 정보나 꿀팁이 담겨있진 않을 겁니다. 하필 그때, 그 장소에서 느꼈던 감정을 글로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길 생각입니다. 도쿄의 킷사텐에서 주문한 메뉴가 무엇이었는가 보다 그날 흘렀던 음악과 공간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쓰게 될 부부의 여행법은 조금 특이한 여행의 기록이자, 취향의 박제이며, 부부가 서로에게 보내는 러브레터가 될 것입니다.


부부의 여행법은 여행과 취향의 기록이자, 서로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입니다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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