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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스카라 Oct 24. 2024

어느 날 삿포로에서 2시간이 생기면

부부의 여행법-일본 삿포로, 재즈바 자마이카(Jamaica)

어느 날 삿포로에 머물 시간이 딱 2시간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새로 산 러닝화를 신고 홋카이도 대학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뛰어 볼까요? 오도리공원 TV타워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야겠죠? 스스키노역 맥도날드 2층 창가에서 멍 때리며 니카상을 구경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니면 삿포로의 명물인 다루마의 징기스칸이나 가라쿠의 수프카레를 먹는 건 어떨까요? 아마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이곳을 알기 전까지는요.


삿포로에선 오도리공원 TV 타워를 보지 못하더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삿포로 스스키노엔 60년 된 전설이 숨어 있습니다


 삿포로의 재즈바, 모던 재즈 자마이카(Modern Jazz Jamaica)를 알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한 유튜브 채널에서 오디오 회사 JBL의 스피커 파라곤 D44000가 60년 넘게 고장 한 번 없이 울려 퍼지는 재즈바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입니다.


 반세기 전에 단종된 세상에 1000대 밖에 없는 스피커, 그것도 한 번의 고장도 없이 점검조차 받지 않은 완벽한 순정 상태의 파라곤을 청음 할 수 있는 재즈바라니! 당장이라도 삿포로로 날아가고 싶었습니다. 스니커마니아가 1985년 발매된 에어조던 1 오리지널 모델의 새 제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비슷한 기분이었을까요?


최고는 아니지만 유일한 소리를 들려주는 스피커


 파라곤 D44000은 JBL사가 1957년부터 1983년까지 27년간 생산했던 홈 스테레오 스피커입니다. 리처드 레인저(Richard Ranger)가 설계하고, 산업 디자이너 아놀드 울프(Arnold Wolf)가 디자인한 파라곤의 외관은 스피커라기보다 거대하고 우아한 빈티지 가구처럼 보입니다.


 가로폭 2.6m에 무게 266kg에 달하는, 중고거래라도 했다간 용달차에 인부 두 명은 불러야 할 파라곤은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딴딴한 내공을 자랑합니다. 파라곤이 전설로 불리는 데는 스피커가 가진 오랜 역사, 우아한 외모와 함께 초창기 스테레오 오디오가 가지는 특유의 소리 울림에 기인합니다.


Paragon D44000의 구조도. 양측 혼의 소리가 가운데 인클로져로 모여 반사돼 퍼져 나갑니다.


 파라곤은 특이하게 양쪽 혼에서 난 소리가 정면을 향하지 않고 오디오의 가운데로 모여 목재 배플에 반사돼 퍼져 나가는데, 소리를 듣고 있자면 아무도 없는 산 정상에서 튼 음악이 반대편 산에 반사돼 돌아오는 메아리의 공명이 느껴집니다. 특히 스피커가 제작된 시절에 발매된 앨범들과 천상의 궁합을 보여주죠.


 70년 전 기술로 제작된 만큼 최신 스피커처럼 명확하게 소리를 재현하진 못하지만, 몇 백 년 된 성당이 품은 아우라처럼 파라곤의 음향은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노트르담 뺨치게 우아한 데다 한 번도 불타거나 보수하지 않은 원래 모습 그대로의 성당이 있다면, 사람들은 성당을 보기 위해서라도 그 도시로 향하지 않을까요?


70년 전 사람들은 어떻게 저런 걸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최고의 술대신 최고의 경험을 선사하는 바


 ‘얼마나 맛있는 술을 내어놓는가?'의 관점에서 자마이카는 최고의 바는 아닙니다. 적당한 위스키 라인업을 갖추고 있지만, 어느 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며 곁들이는 음식은 평범하다 못해 조악한 수준입니다. 르챔버의 화려한 시그니쳐 칵테일을 기대하거나, 특별한 미각적 경험을 원하는 분이라면 실망할 게 분명합니다. 게다가 일본의 많은 바가 그렇듯, 이곳은 흡연이 허용되는 구역이라 비흡연자에겐 자리를 지키는 것 자체가 곤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멋진 경험을 할 수 있는가?'의 관점에서 자마이카는 최고의 바입니다. 괴물 스피커와 1960년대 음반을 위주로 소장된 2만 3천 장이 넘는 LP와 CD 외에도, 그 둘을 완벽히 조율하는 마스터의 존재는 어째서 삿포로의 밤을 여기서 보내야만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맛있는 술을 내놓는 바는 많지만 이 정도로 맛있는 음악을 내놓는 바는 드뭅니다


 바에 앉아 음악을 듣다 보면, 대략 10분에서 15분 단위로 앨범을 갈아 끼우는 마스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손님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도, 귀신같이 정확한 타이밍에 음악을 바꿔 틀고 앨범 커버가 손님을 향해 보이게 올려 두시죠. 때가 되면 음반이나 갈아주는 일이 뭣이 어려울까 싶겠지만, 사실 이건 아주 능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만 장이 넘는 앨범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음악의 기승전결을 완전히 이해해야 하고, 지금 손님들이 어떤 음악에 호응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찰력도 필요합니다. 판을 갈 때도 넘치는 정수물 주워 담듯 분주하게 움직여선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히 수행했을 때, 손님은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음악에 관한 최고의 경험을 선사하는 바, 자마이카는 그런 경험을 전해주는 몇 안 되는 재즈바입니다.


재즈바 자마이카에서 보내는 퍼펙트 데이즈

집으로 가기 전 자마이카에서 하루를 정리하는 사람들


 일본의 재즈바를 들를 때마다 십중팔구 혼자 온 샐러리맨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날도 샐러리맨 두 명이 바 테이블을 지켰습니다. 특유의 각진 크로스백을 짐 바구니에 구겨 넣고, 잔 술을 넘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걱정이나 애달픔 대신 괴이할 정도의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혼자 덩그러니 존재했을 때 더 완전해지는 파라곤 스피커처럼 말입니다.


 마스터가 올려둔 빌 에반스 트리오의 첫 음이 파라곤 스피커를 타고 진하게 쏟아집니다. 가게 오른쪽에 난 유일한 작은 창으로 가타카나인지 히라가나인지 모를 문자의 네온사인이 뭉개져 들어옵니다. 평소라면 불쾌했을 담배 연기가 재즈 선율에 희석돼 그럭저럭 견딜만합니다. 재즈바가 낯선 아내는 그날의 분위기를 분주하게 그림으로 담아냅니다. 그렇게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네, 삿포로에서 딱 2시간이 생기면 저는 무조건 이곳으로 향하겠습니다.




* 글에서 소개된 곳


1. 홋카이도대학 은행나무 가로수길

https://maps.app.goo.gl/epAA8pjiDN5xscJaA

2. 삿포로 TV 타워

https://maps.app.goo.gl/None4yGc93KK8bUp8

3. 맥도날드 삿포로 스스키노점

https://maps.app.goo.gl/hyErc4ZGsd6MxqZ49

4. 다루마 본점

https://maps.app.goo.gl/ZvBqBZLyj5TaBWKV6

5. 스프카레 가라쿠

https://maps.app.goo.gl/VsVRqkQi6M7GNXd78

6. 모던 재즈 자마이카

https://maps.app.goo.gl/SeKvaVHMHnWEvXis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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