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어떻게 버텼는지 싶은 때가 있다.새벽 4시에 회의하자는 본부장의 말이 아무렇지 않았던 때이다.
새벽에 퇴근 후 들어와 신발을 벗고 신발장에 정리를 하고 있을 때, 인기척에 잠시 나온 엄마는 벌써 출근하냐는 말을 했었다.
당시 회사에서는 우리 부서 사업의 매출 저조와 경쟁력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던 때였고, 부서 생존이 걸려있다 보니 심지어부서장님은 사무실 한 켠 구석에 매트릭스를 두고밤낮없이 일하시던때였다.
그럼에도 '보람'하나로버텼다.
내 기획안이 좋은 성과를 내고, 내로라할 전문가들이 내게 자문을 구하고, 팀장들 중에서도 가장 경력이 짧은 내가 부서 대표로 대표님과회의를 하고. 이 모든 것들이 그렇게 새벽까지 일한 보상이고 보람이라고 생각했다.
연말 인사평가도 기대했던 대로 부서 1등을 했다.
인사평가의 꽃은? 당연히 연봉이다. 그동안의 고생을 연봉으로 보상받을 생각에 한껏 기대를 안고 연봉협상 미팅에 들어갔다.
이팀장이 이해해줘. 부서 상황이 안 좋잖아.
부서장의 말은 이러했다.
매출에 따라 부서별로 연봉인상 총액이 결정되는데 우리 부서는 매출 저조로 총액 자체가 적었고, 이 금액 안에서 인사평가 순위별로 부서원이 나눠갖다 보니 1등을 했음에도 액수가 적다는 것.
적어도 너무 적었다. 내가 이룬 성과나 나의 고생의 값이 이 정도라기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1등인 내가 이 정도인데 같이 고생한 다른 직원들은 이보다도 더 적을 것을 생각하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후 충격적인 카더라 소문을 들었다.
직원 D는 인사평가와 상관없이 나의 7배가 넘는 인상 금액을 받았다는 것.
대부분의 회사는 본인의 연봉을 발설하는 것은 사칙으로 금지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D는 인상된 연봉에 신이 난 것인지 바보같이 술자리에서 본인의 인상액을 직접 말했다는 소문이었다.
인사평가 순위에 대해서는 서로 말한 적이 있어 그분의 순위가 하위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근데 나보다 인상금액이 많다고?
아무리 카더라 소문이더라도 내겐 확인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보상과 보람이 원동력이었던 내겐 무지 중요한 문제였기에 부서장님께 1:1미팅을 요청했다.
너 그거 어디서 들었어?
아 이 소문이 사실이구나. 사실이 아니었다면 무슨 소리냐고 물을 텐데 어디서 들었냐고 되묻다니?
결국 소문은 사실이었다. D팀장이 경력에 비해 현재 연봉이 낮고 사사롭게 고생한 게 많다는 게 궁색한 변명이었다. 사실 진짜 이유는 정치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D팀장은 내 글에서 자주 언급된 적 있는 일명 똥빠남이다. (일을 하는 것보다 윗분들에게 잘 보이는 게 중요한 분)
"그럼 저는요? 그럴 거면 인사평가를 왜 해요?
저도 알려주세요 그렇게 뒤에서 더 받는 방법."
직장생활 중 가장 화가 난 순간이었고 그 자리에서 퇴사의사를 밝혔다. 다소 충동적인 발언이긴 했지만 아예 고려하지 않은 옵션은 아니었다.
"OO아, 버티는 자가 이기는 거야. D팀장 봐, 아무리 뒤에서 직원들이 수군대도 뚝심있게 버티잖아."
지금 저게 말이야 방구야. 이런 부조리를 알면서도 버티는 게 이기는 거라는 말도, 정치질하는 D팀장을 본받으라는 말도 모두 이해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여기서 내가 배울 것이 없다는 생각에 더더욱 확신이 생겨6년을 몸 담았던 첫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내가 회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1) 배울 것이 있느냐 (성장 가능성)
2) 보람이 있느냐 (보상, 인정, 감정적인 보람)
이 두 가지이다. 이 2가지가 사라질 때 퇴사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버티는 게 이기는 거라고? 너무 옛스럽다.
물론 '고난과 역경에도' 버티는 자가 이기는 거라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위 부서장의 말처럼 얼토당토않는 상황, 그리고 내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요즘은 면접자도 면접자리에서 회사를 평가하고 알아보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가치와 부합하는 곳인지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당신이 직장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 내가 뱉은 사직서가 충동적인지 옳은 선택인지 확인하기 좋은 질문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