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11년 전이기에 몇몇의 기억들은 사라졌지만, 그때의 몽글몽글했던 감정들은 아직 기억에 남아있다.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매번 했던 이야기들임에도 남편 또한 이런 얘길 하는 것을 좋아하는 걸 보면, 우리는 참 죽이 잘 맞는가 싶다.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할 때 우리끼리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이게 운명인가, 인연이란 게 진짜 있나 보다."
우리는 11년 전 알바를 하며 처음 만났다.
남편의 기억을 본떠오자면,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내가 첫 출근 후 교육을 받을 때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두근거렸다나. 계속 눈길이 갔지만 쑥스러움과 혹시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티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내 기억 속 남편의 모습은 "나 알바하는 곳에 천정명 닮은 사람 있음 ㄷㄷㄷ". 남편의 존재를 인식한 후 처음 든 생각을 친구한테 문자로 보낸 기억이 난다.
당시 남친이 있던 터라 친구에게 소개나 시켜줄 생각이었다. 게다가 남편은 마음을 전혀 티 내지 않았고 오히려 내게만 심드렁한 태도였기에 나를 인간적으로 싫어하는 줄 알았다.
같이 일하던 또래들끼리 밥을 같이 먹는 횟수도, 퇴근 후 술 한 잔 하는 횟수도 점점 늘어갈 때였다.
다 같이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당시 남친에게 전화가 와 통화를 했고, 남편은 당시 내가 통화하는 모습에서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아, 지금 남친과 썩 행복한 상황은 아니구나.'
상대가 있는 사람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던 남편은 본인의 감정에 혼란스러웠었다고 한다. 나는 당시 남친과 진짜 사랑인지 고민스럽던 시기였고 자꾸 남편을 보게 되는 눈길을 애써 거두곤 했다.
단체 회식이 있던 날, 낯을 가리던 나는 조용히 집에 갈 생각을 하며 가방을 싸고 있었다.
"OO씨, 이따 갈 거죠?"
-음? 어,,어,ㅇ,
"가요 같이"
거의 처음 한 대화였다. 몰래 도망치려던 게 들켜서인 건지 첫 대화라 그런 건지 꽤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은 그때 혹여 내가 가지 않을까봐 긴장된 마음을 감추려 온갖 쿨한 척을 무장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서로 몽글몽글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다가 남편이 그만두는 날이 왔다.
"모두들 만나게 되어 즐거웠어요. 담에 또 봐요!
010-0000-0000"
[남편의 시선]
당시 또래 대부분과 번호교환을 했었던 그는 내 번호만 없어 고민을 거듭하다 회사 메신저에 단체 쪽지를 남겼다고 한다. 연이 있다면 나와 연락이 닿기를 바라며.
[나의 시선]
쪽지를 봤지만 처리해야할 일이 있어 나도 모르게 번호만 복사해 놓고 쪽지를 꺼놨었다. 당시 메신저는 휘발용이라 쪽지를 닫으면 다시 오픈이 안되었었고, 일처리를 끝내자마자 복사해 놨던 번호를 급히 폰에 저장했다. 뭐에 홀린 듯 번호 복사, 저장을 했던 것이 우리 부부의 연을 이어줬다니.
번호를 저장한 후에도 그에게 연락을 하기까진 꽤 시간이 걸렸다. 당시 내 상황도 정리가 필요했고 내 마음이 뭔지도 알아봐야 했다.
고민 끝에 먼저 카톡을 했지만 답장은 몇 시간이나 지나서야 왔다. 나는 역시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생각했었는데 남편은 어떻게 답장할지 수시간을 고민했단다. 솔직히 딴짓했냐며 따졌지만 내심 이 얘기를 들으니 그때의 감정들이 생각나 11년이 지났음에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10년 연애하면 가족 같지 않아? 남자로 느껴져?
남편과 연애시절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물론 가족처럼 편한 것도 맞고 그때 그 시절처럼 마냥 뜨거운 사이는 아니다.
다만 처음 사랑을 시작했던 순간들을 잊지 않고 서로의 소중함을 항상 생각하니 오히려 뜨거웠던 사이보다 더 끈끈한 사이가 된 것 같다.
연애기간이 오래되었거나 결혼한 커플들에게 설렜던 그때 그 시절의 우리에 대해 가끔 이야기해 보길 추천한다. 예뻤던 감정들도, 서로의 소중함도 다시금 느낄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