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사랑은 없다 후기
이전부터 쇼펜하우어는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 중 1위에 꼽힐 정도로 애정했다. 특히나 21살 무렵 젊음에 수많은 고뇌를 가지고 있던 시절 쇼펜하우어 번역본 인생론을 보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오만가지 번뇌를 받아들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막 20살이 되었던 당시 갖고 있던 물욕, 성욕,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그 수많은 잡생각들이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있다 보면 거짓말처럼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잠들기 전 그저 아무 페이지나 펴고 밑줄을 그으면서 읽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점차 쇼펜하우어의 가르침이 잊힐 때쯤, 이번 독서 모임에서 쇼펜하우어의 저서가 있는 것을 보고 홀린 듯이 신청했다. 그리고 책을 펼치자, 쇼펜하우어의 고민이 보였다. 아버지의 애정과 믿음과 ‘학문’의 기로 앞에서 결국 아버지가 바라던 ‘사업가’를 선택했던 쇼펜하우어. 자신이 학문을 공부하기에 너무 늦은 것 아닌가 한탄하고 있을 때 ‘어머니 친구’ 페르노프의 편지 ‘지금까지 보낸 세월은 헛된 것이 아니다’라는 편지 내용을 받고 감동의 눈물과 새로운 결심을 보인다.
이 내용이 책 내용 중 그 어떠한 것보다 감동적이었다. 그저 냉혹하게, 자신의 길을 가왔으리라 생각했던 쇼펜하우어마저도 자신의 꿈과 학문에 대한 좌절과 고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고뇌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나아갔다는 점으로부터 동질감을 느꼈다.
쇼펜하우어 에세이기에 여러 내용이 있었기에 ‘나’의 중심으로 가장 와닿았던 3가지로 내용을 분류해 보면 ‘사랑, 행복, 죽음’이었다.
쇼펜하우어의 관점의 사랑은 종족보존에 대한 ‘인류의 의지’로 보았다. 특히나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 중 여자의 신체적 매력, 결혼의 제도, 그리고 남자의 성적 욕망까지 그 모든 것은 판타지이며 결국 생물학적 우리 속에 각인된 행동기제로 귀결된다 주장한다. 몇몇 내용들은 지금 시대에 공적인 자리에 언급하는 순간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꽤나 동의할 만한 내용들이 있었다.
여자가 남자를 바라볼 때 중요시 여기는 ‘남자의 체력과 용기’라는 특질, 남자가 여자를 바라볼 때 중요시 여기는 ‘나이와, 신체적 매력’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무의식적 깊이 우리들의 생존과 번식이라는 큰 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동의한다. 그리고 그 특성을 이성을 찾는 현재에서도 명확히 적용되고 있기에 크게 할 말이 없다. 저자의 시대보다 수백 년이 흘러도 사랑을 부르짖는 로맨틱한 소설과 드라마에는 저 특성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쇼펜하우어가 주장하는 것이 실상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게 적용가능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중요시 생각하는 이유에는 분명 인류의 보존이라는 가치가 스며들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행복을 위해서 추구해야 할 번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취해야 할 태도와 관점에 대해서 단순한 삶을 추구하고 욕심을 버림을 강조한다. 또한, 타인의 시선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는데. 이에 대한 적절한 예는 죽음의 얼마 남지 않은 순간마저도 타인에게 나를 어떻게 보여야 할지 고민하던 사형수의 예가 적절해 보인다.
분명 타인의 시선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으나, 노예처럼 종속되어서 자신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대부분 타인의 시선으로 채워 버린다면 그것만큼 헛된 것이 없을 듯하다. 그리고 지금도 타인의 눈으로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는 나의 어리석음이 문뜩 떠오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늙음,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대목에서는 참으로 많은 사색과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이제 막 30의 초입에서 40, 50, 60, 70이 되어서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각은 점점 둔해지고 나의 신체는 점점 늙어가 죽음을 준비하게 될 것이 자명했다. 밖에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 길거리의 노인이 보인다. 아, 언제가 땅속으로 들어가 썩어버릴 내 육체는 어찌 될까? 나의 무대가 끝나가지 전, 무엇을 해야 기쁜 마음으로 세상을 등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후회하지 않을까? 고뇌가 다시 물밑들이 나를 덮친다. 그럼에도 쇼펜하우어의 문장 덕분일까 나의 고뇌가 그렇게 싫지 않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우리가 상대방을 부를 때 아무개 씨라고 부르지 말고 그 대신 ‘고뇌하는 나의 벗’이라 서로 불러주자”
-쇼펜하우어
“나의 벗 고뇌하는 쇼펜하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