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게임이 십오 분이면 대략 끝나는데, 아직도 빈 코트가 없다. 다섯 개나 되는 코트가 꽉 찼다. 벌써 셔틀콕 4개를 모아 코트 중앙 네트 밑에 가져다 놓는 대기팀도 있다. 휘익 둘러보니 코트 밖에 기다리는 사람 중 같이 칠 만한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일단 A급 젊은 애들은 우리 같은 늙다리한테는 눈길도 안 준다. 공연히 눈길 줬다가 '한 번 쳐주세요'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 애들은 게임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들끼리 팀을 바로 짜버린다. 그래서 어중 띄기 늙다리 C급이 혹여 치자고 하면 바로 '게임 짰는데요'하며 거절할 수 있다. 합법적이며 이성적인 거절방법이다. 틈을 주지 않는 아주 치밀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젊은 애 중에는 콕을 모아 팀을 짜면서 내 좌우에 앉아있는 젊은이들에게만 오퍼를 하고 나는 건너뛰는 고도의 전략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으며 실행해서 내게 모멸감을 주기도 한다.
사람은 많고 코트가 부족하면 이런 현상은 더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눈치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면 어느새 한 판 굶기 일쑤다. 두 판째 건너뛰게 되면 그때부터는 은근슬쩍 부아가 치민다. 그래도 아닌 척 같이 칠 사람이 없나 하고 기웃거려야 하고 낑겨가기 위해 손에 셔틀콕을 하나 들고 나를 광고해야 한다. 광고 시장에 물건이 좋아야 팔리듯이 잘 치고 매너 좋고 인물이면 인기 만점에 여기저기서 자주 불러간다. 일단 우리 또래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딸린다. 그러니 팔릴 리가 없다. 시장 가치가 없다. 상점에 진열된 구색 맞추기 삼류 제품이다. 혹여 자비심이 강한 사람들이 있어서 가끔은 그들 틈바구니에 끼어들 수가 있다. 기회가 있을 때 최선을 다 해서 쳐야 한다. 겨우 잡은 기회에 실수라도 연거푸 해버리면 동호회 내의 내 수준 평가는 하향 조정되고 그들과의 다음 게임은 기약하기 어렵다. 벽에 붙어 앉아 있어도 불려지지 않는 말뚝이 되어버린다.
가끔 은퇴하고 시간이 나서 배드민턴 치겠다고 클럽에 오는 새 멤버를 보면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운동하는 사람들이니까 참 리버럴할 것 같고, 같이 땀을 흘리면서 운동을 하기에 팀워크도 좋을 거 같고 한데, 막상 회비내고 들어가 보면 그 분위기는 싸~ 하다 못해 배타적이기까지 하다. 신입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따로 없다. 새로 왔다고 인사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되면 되면 하면서 몇 번 쳐주기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권하지도 않는다. 넉살이 좋아서 그런 분위기에 잘 적응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고 보면 유유상종이다. 연령, 성별, 급수, 가입 기간 등이 변수가 되어 끼리끼리 동아리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 잡게 된다. 자기가 낑겨 들어가야 할 파벌이 어디인지 잘 파악해야 한다.
나는 우리 동아리에서 비교적 연식이 좀 되어서 그런지 여기저기 잘 낑겨간다. 힘은 없지만 세월을 많이 보낸 사람들끼리 조그만 세력을 만들어 동아리 내의 입지도 있는 거 같다. 이러한 입지를 구축하는 일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고 유지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우리는 이런 지위를 얻기 위해 가장 짧고 쉬운 길을 선택한다. 밥사와 커피사와 치맥사이다. 게임이 끝나고 후배들이나 고수님들을 위해 밥을 사거나 음료나 술을 사면서 그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동정심과 자비심을 얻는 일이다. 비굴하고 존심이 상하는 듯이 보여도 이 방법은 양쪽을 위해 다 좋은 일이다. 젊은이들도 매한가지로 나이 든 사람들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런 벽을 깰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만들어 주면 그들도 다음번 코트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한 껨 하실래요?' 하고 먼저 말을 걸어오는 효과가 생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꼭 전략은 아녀도 사람이 가까워지려면 매개체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클럽 내에서 별로 말을 섞어본다든가 게임을 같이 해보지 않았던 친구와 우연히 얽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해보면 앞에 말했던 모든 게 내가 상상했거나 오해해서 발생했다는 걸 알게 된다. 셔틀콕 4개를 모으면서 나를 건너뛴 것은 같이 뛰다 다칠까 봐 배려해서 그런 거고, 앞 게임이 끝나자마자 팀을 바로 짜는 것은 없는 시간에 와서 운동하는 데 효율성을 제고하고자 하는 거고, 인사를 잘 안 하는 것은 아니 못하는 것은 운동 올 때는 안경을 빼고 와서 사람 구분을 잘 못해서 그런 거란다, 운동 끝나고 밥 먹자고 했을 때 거절하는 것도 운동 나오느라고 집에 가서 보상을 반드시 해야 하므로 빨리 들어가 봐야 해서 그런 거라고...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모든 오해를 털고 오늘도 셔틀을 날리며 땀을 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