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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개 Jan 23. 2021

더러워도 좋았다, 그거뿐이었는데

작년 겨울부터 가족들과 실랑이하던 주제가 있었다. 하얀 운동화 - 정말 싸구려지만 벗고 신고 너무 편했던 - 가 너무 더러웠던 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신발을 사는 것에 있어, 아니 나를 위한 무언가를 산다는 것에 있어 늘 망설임이 컸고 그 와중에 까다로운 취향까지 맞추려다 보니 소비는 즐겁기만 한 취미는 아녔다. 그래서 한 번 마음에 든 신발을 밑창이 다 닳도록 신었고 더러워져도 좋아했다.

 그 신발은 예전의 애인과 같이 산 게 맞았지만 추억 때문에 신발을 버리지 못한 건 아녔다. 피, 땀, 콧물 다 묻혀가며 막노동을 함께 했던 구구절절함 때문에 버리지 못한 것도 아녔다. 내가 맥시멈 리스트여서 그런 것도 역시 아녔다. 그저 편했고 나는 새로운 것보다 익숙한 게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발을 지적받기 시작한 이후로부터는 호크룩스마냥 신발에 내 영혼을 떼어 주었다.


 나 역시 나사 빠진 인간이었다. 어디 가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이전에는 그렇게 추측했는데 확신하게 된 몇 개의 계기 덕에 내 인간관계는 불신과 헌신 사이, 줄타기의 연속이었다. 애착이 아니면 애증이었고 사랑이 아니면 슬픔이었다. 내 단점을 재단하기보다는 모두들 캡처하고 인스타 스토리로 돌려 보는 느낌이었다. 이 우울하고 침울한 감정은 오롯이 신발에 이입되어 결국 신발은 나 같은 존재가 되었다.

 버리기 싫다는 말과 새로운 신발을 사 줄 테니 그럼 그거를 신어라- 라는 역사적인 타협이 이뤄졌고 본가에 그 신발을 내려놓고 왔다. 새신은 예뻤지만 정이 붙지 않았고 낙동강 오리알 같은 그 신발만 처연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근황이 전해졌다. 내 고집으로 인해 세탁소에 파견 나간 신발이 "세탁 불능"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돌아왔다. 아, 고쳐 쓰기 어려울 정도로 내가 힘들게 했구나. 아, 나도 고쳐지지 않았는데 그치.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하더라"라고 말하던 전 애인의 이야기까지 문득 비보에 함께했다.

영화 《셰임 (Shame) 》은 성 의존증에 빠진 한 남자의 영화이자 버려지기 무서워하는 한 사람의 영화이다. 《셰임 (Shame) 》의 주인공은 공허함을 온몸으로 표현하곤 했다.

 누나는 세탁소가 세탁을 "포기했다"라는 말로 한계점에 봉착한 나를 표현했고 구구절절 깨끗이 신발을 관리하는 법을 알려주는 엄마의 잔소리가 나를 더 비참하게 하는 듯했다. 저런 걸 세탁소에 보내는 것도 "창피했다"라고 말했다. 그걸 신은 나도 창피했다고 들린다. 신발은 내 얼굴이란다. 나는 그래도 좋았는데. 그렇게 말은 못 했다. 설명하기 힘든 감정만 혼자 풀어놓을 뿐이었다. 창피한 아들인 것도 맞았고 더러운 신발인 것도 맞았으니까.


 비를 맞고 가는 누군가를 그냥 보지 못하는 절대적인 오지랖이 있다. 착해서가 아녔다. 그냥 어릴 적부터 누군가가 우산을 나에게 씌어주지 않았다는 피해망상 때문이었다. 내가 씌어준다면 저 사람은 나처럼 아파하지 않겠구나- 하며 말이다. 버려지기 싫어서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도 버려지지 않을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못 버렸다. 정이 붙은 아무개는 버리지 못했다. 쉴 틈 없이 버려져도 버리지는 못했다.


 가족들도 이해 못할 예민함과 우울함을 꾹꾹 누르고 버리라고 말했다. 내가 버리는 게 아닐 테니 더 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평생 못할 수도 있으니 대신해주는 것에 기꺼이 기뻐해야 한다. 그래도 좋았는데, 그거뿐이었는데. 나는 좋아하는 게 점점 무서워진다. "네가 좋아해서 연락하기 어렵다"는 말도 생각난다. 오늘도 나사 하나가 기어이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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