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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개 Mar 30. 2021

맥시멀리스트로 산다는 것

애정 결핍 그 자체일 때

"오늘 이삿짐을 쌌는데요. 짐을 한 아름 안고 나르려다가 결국 다 쏟아지더라고. 그렇게 다 떠안으려하면 이렇게 되는 거 같아. 그러지 말라고 하는 말이에요."


 아끼는 동생이 애정 섞인 잔소리를 해줬다. 혼나고 싶어 어리광이란 어리광을 모두한테 다 부렸는데 결국은 나보다 한 살 내지 두 살 어린 동생들에게도 투정을 부렸고 원하던 잔소리를 들었다. 철이 없는 척하다가 비로소 철이 없어진 근황이다.


 쉽게 버리지 못했다는 내 일기는 의도보다 더 많이 지인들이 읽어줬고 나를 소개하는 글이 되어버렸다. "태생이 우울한 새끼"라고 자칭했던 나로선 생각보다 꽤 큰 소득이었고 더 깊숙하게 우울해지는 기회가 되었다. 그간 애착 아닌 애증 같은 사랑도 해봤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환기해보려 노력했다. 모든 게 도루묵이었던 근 2주 간에는 고정적으로 연락하는 사람이 생겼지만 또다시 애증과 애착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행하고 있다. 이쯤 되면 줄타기 장인이 되어야 하는데 결과물은 늘 낙방이다. 재수생 출신 답지 못하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인연 덕에, 그 탓에, 나는 생각보다 사소하게 변해있었는데 오늘은 그중에서도 맥시멀리스트인 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네이버에서 쳤다. 다음카카오 미안 ⓒ naver.com

 맥시멀리스트는 미니멀리스트의 반대말로 사전적 정의는 상당히 터프하다. "타협을 배제하고 최대한을 요구하는 자, 과격주의자." 내가 과격하게 최대한을 요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니멀리스트 혹은 그 중간은 확실히 아니니 맥시멀리스트가 맞는 거 같다. 미니멀라이프가 "풍요 속 결핍"이라는 표현으로 묘사된다면 나는 늘 "결핍 속 결핍"이니 그마저도 맥시멀라이프다.


 무엇하나 쉽게 버리지 못했고 애착이 가는 건 어떤 의미부여를 해서라도 버리지 못했다. 전 애인의 물건과 사진을 정리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물건은 죄가 없다"라는 말 덕에 힘입어 청산할 수 있었다. 제법 웃긴 건, 추억이 상처로 전환되는 시기에도 쉽사리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화되지 못한 그 상처들마저도 의미부여를 기가 막히게 하면서, 해내면서 나는 상처마저 떠안으려 노력했다.


 이 습관은 아무래도 과거에는 없었던 것 같다. 상처 받는 게 무서워서 하고 싶은 말을 꾸욱 참으려 노력했던 더 이전을 보면 말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상처 받을 거 같으면 말하지 못했다. 지금도 긴 통화 속 "졸려", "배고파"와 같은 원초적인 답만 즐비한 밤중에도 나는 일상을 말하지 못했다. 당신을 방해할까 봐, 내가 생각보다 웃기거나 재밌지 않아서 실망할까 봐, 내 딴에 하는 배려가 또다시, 되려 당신에게 화가 될까 봐. 과거에 늘 반복했던 실수들로 인해 관계에 금이 갔고 오롯이 상처로 성장했다. 오늘날의 나는 그 상처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라는 기가 막힌 의미부여로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을 테지만.

카더가든 "우리의 밤을 외워요" MV 속 한 장면. 나는 이 노래를, 이 뮤직비디오를, 둘의 사랑과 이별을 사랑한다 ⓒ youtube.com

 연애에 있어 전에 만난 사람들은 마치 호봉처럼, 한 단계씩 더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자 했던 적도 있었고 한 사람에게 정착했을 때 오랜 시간 동안 배울 점을 내 것으로 만들려 노력했었다. 이것도 맥시멀리스트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상처뿐이었던 과거도 어떻게든 떠안으려 노력하고 있으니 말이다. 참 오랜 시간 지났다고 생각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그 상처 때문에 나는 제자리걸음인 듯싶지만 끝내 버리지 못했었다. 잠 못 자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상처 때문에 이렇게 노트북 앞에 섰는데도.


 꽤 길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제법 추해졌는데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좋은 사람,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자르겠다는 다짐은 무기한 보류, 연장 선상을 걷고 있다. 잘라야지 싶더라도 나에게 큰 기대가 없다는 걸 마주하면 - 추하든 뭐든 나한테 기대도 실망도 안 한다는 것을 자각하면 - 사랑받지 못한 오늘만을 더 곱씹게만 된다. 머리카락 그깟 게 뭐라고- 하면서 무기력한 내일을 기다린다.


 나는 차단에 익숙한 사람이다. 차단의 이유와는 늘 어색한 관계지만 말이다. 다 그릇은 작은데 마음만 커서 생긴 일이다. 나나 상대나 적당하게 사랑했어야 했는데 나는 항상 차고 넘쳤고 상대는 늘 메말랐다. 균형 맞추기는 항상 어려웠고 그 어려움을 인식할 때 즈음 나는 밑 빠진 독에 내 사랑만 들이붓고 있었다. 내 마음이 아까운 줄 모르고 깨진 그릇이 아까운 줄만 안다. 불운하게도 지금도 그렇다. 나 혼자 좋아하는 거 이제 안 한다 했는데.


《조금만 더 가까이 (2010)》의 한 장면 ⓒ youtube.com


 "결핍 속에 결핍"은 맥시멀리스트요, 어쩌면 나다. 앞에 괄호 붙이고 '애정'이라고만 쓰면, 그게 바로 나다. 쓸데없이, 돈 욕심이나 냈으면 진작에 "애정"도 풍요로왔을 텐데 사람을, 사랑을 욕심 내서 뭐 하나도 제대로 충족된 게 없다. 은희 (정유미 역)처럼 지금의 나는 연애 불구인 걸 잘 안다. 그래도 사랑받고 싶은 건 여전하니 나는 맥시멀리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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