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빛이오, 세상의 봄이로소이다

(15) 뻔뻔하게 글쓰기

by 박지아

"나 같은 게 글을 써서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보세요.


세상에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 사람들도 입 꾹 다물고 잠잠하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나 따위가 뭐라고 글을 쓴단 말입니까?


그저 글 쓰는 게 좋아서 글을 쓴다는 말도 이상해요. 글 쓰는 게 좋으면 몰래 써서 서랍에나 넣어둘 것이지, 대체 뭐가 잘났다고 이따위 글을 브런치에 올리고 발행 버튼까지 누른답니까?


이런 생각에 붙잡혀 있다가, 어영부영 글을 쓰지 않은 채 또 몇 개월을 흘러 보냈고, 그러는 사이에 제 에세이집도 출간되었습니다.


1년을 끌었는데 이게 드디어 나왔어요.


그런데 영 기쁘지는 않고. 몸도 마음도 가라앉기만 합니다.


책만 나오면 좋을 것 같았는데, 오히려 착잡한 게 머리만 복잡해질 따름입니다.




KakaoTalk_20260323_101001464_01.jpg ▲ 파주 출판단지의 매화. 지난주까지 이랬으니, 지금은 터졌을지도 모르겠다.


글로 쓰인 나의 얼굴이여,
영영 부끄럽지 말아 다오


출간된 책을 보니까 부끄러워요.


좀 한심하고.


이상하게 우울하고.


생각만큼 기분이 시원치가 않아요.


그래도 세리머니는 해야 하니까, 이제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괜히 골칫거리 주는 기분이라 미안해서 뇌물용 드립백 커피까지 끼워다가. 여기저기 알리기도 하고, 우왕좌왕. 우당탕탕. 그렇게 한 주를 보내고, 다시 월요일이 되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더 뻔뻔해지고 싶다.


더럽게 뻔뻔해져서, 내가 쓴 글이라면 무엇이건 스스로 좋아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쓰는 것도, 어디에 올리는 것도, 인쇄하는 것도, 영영 부끄러움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KakaoTalk_20260323_101001464.jpg ▲ 이태원 근처 카페, 히트커피로스터즈에서.
불쑥 튀어나온 무서운 나의 병증, 나의 책


공교롭게도 어제는 또 제 생일이었습니다.


토요일에 지인에게 책을 전해줄 겸, 바람도 쐴 겸, 이태원으로 갔어요. 접시를 갖고 싶었거든요. 작년에 이태원 앤티크 거리에서 접시를 두 장 샀는데, 그중에 한 장을 깨 먹었어요. 나에게 주는 생일선물 겸, 집에 큰 접시가 없어서 앤틱으로 하나 장만할 생각이었습니다.


오전 11시쯤 도착했을까요.


이태원은 여전하더군요. 약간 한산한 느낌이었습니다.


근처 카페에 앉아 지인을 기다렸습니다. 무슨 카페가 바처럼 새카맸어요. 그나마 넓은 창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왔지요. 창밖에는 해밀턴 호텔, 봄 햇살, 사람들, 도로, 차. 이국에서 온 사람들. 그들의 옷차림과 피부색. 곁에 가면 들려올 듯한 낯선 언어.


1년 전에 이태원에 왔었죠.


책을 한참 쓰던 것도 그때 무렵이었던 것 같고.


그러나 1년간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 다른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1년간 있었던 많은 일들이, 지금의 자신을 괴롭게 했어요.


제 책을 꺼내봤습니다.


사실 책이 나온 이후에 한 번도 읽지 않았어요.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으로 이 책을 썼는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끔찍했거든요.


양극성장애라는 병.


폭풍같이 몰아닥친 조증.


나도 의사도, 심리상담사도 몰랐던 광기.


그리고 그 사이에 있었던 사건, 사건들, 많은 사건들.


이 책을 쓸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나 다른 사람인데, 그때의 생각이 물질화되어 세상에 나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책이 영영 나오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뿌려져 버렸고, 그저 책을 내 주신 출판사 대표님을 위해 많이 팔리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어졌습니다.


이게 최소한의 양심이죠. 그 외엔 없었습니다.


KakaoTalk_20260323_101001464_03.jpg ▲ 언제 봐도 아름답고 늠름한, 이태원 이슬람 사원.


겨울이 끝났어.
정말로, 겨울이 끝났구먼.


지인과 이태원 이슬람 사원으로 가는 능선을 올랐습니다.


앤티크 샵들이 많이 문을 닫아서 접시는 못 샀지만, 그래도 외국인 마트에서 눈요기는 쏠쏠하게 했지요. 장미잼을 하나 사고, 할바(볶은 깨를 스프레드처럼 만든 중동의 간식) 하나를 샀습니다.


사원 가는 길에 있는 재밌는 식당이나 가게도 볼만하지요. 이미 케밥 하나를 먹은 지인은, 또 다른 식당에서 나는 전기구이 닭 냄새에 홀렸습니다. 이 골목은 향신료 냄새가 또 굉장하거든요. 현지인들이 다닐 것 같은 카레집이 하나 있기에 꼭 다시 오기로 했습니다.


언덕을 다 오르자, 흰 이슬람 사원이 나타났습니다.


티 없이 푸른 하늘과 흰 건물. 쏟아지는 햇살.


화려한 자주색 사리를 입은 인도 여인이 친구와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아예 삼각대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사원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고, 숄로 머리카락을 감춘 여인들도 있었지만, 좌우간 한국인은 우리 빼곤 없었지요.


행동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철저하게 외부자가 된 기분도 들었죠.


여기는 어딜 봐도 한국 땅은 아닌 느낌이고. 내가 아는 사람들도 아니고, 아는 말도 아니고, 아는 기도문도 아니고. 이방인들 사이에서, 나는 또 이교도가 된 기분이고.


한동안 돈이 없어서 여행을 못 갔으니까.


어쩌면 표류하는 느낌을 이태원에서 받고 싶었던 건지도 모를 노릇이죠.


낯선 1년 전의 나.


낯선 나의 책.


벌써 38번째를 맞이한 생일.


여전히 기쁘지는 않고, 오히려 아득한 고립감이 느껴지더군요.


내 책을 읽은 사람은 책 속의 나를 나로 알겠으나, 그게 아님을 설명하려면 또 어떤 많은 글자가 필요할 것인가? 그 말을 이어나가려면 또 어떤 용기가 필요할 것인가?


지긋지긋한.


너무나 지긋지긋한 막막함.


이슬람 사원에서 대단한 깨달음이나 얻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3월 말의 봄햇살과 함께 사라지고요. 여전히 지리멸렬한 자신을 발견하고선 맥없이 능선을 걸어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목련 꽃이 피었더군요.


그러게요. 무너진 돌담과 삐죽삐죽한 철망 너머로 목련꽃이 피어 있더군요. 한때 서 있던 주택을 허물기라도 한 것인지 영락없는 폐허 꼴이었는데도, 목련꽃이었습니다. 양초처럼 하얗게 복스러운 꽃 무더기를 보곤 오히려 기운이 빠져, 비틀비틀 걸어 내려오며 생각했지요.


겨울이 끝났네.


그러게. 겨울이 끝났어.


정말로. 겨울이 끝났구먼.


또 열심히 살아야 할, 1년이 시작되었구나.


열심히 산다, 그런데 무엇을 하며?




KakaoTalk_20260323_101001464_02.jpg
나는 봄이오, 세상의 빛이로소이다


"나 같은 게 글을 써서 뭐 하나."


근데 또 생각해 보면, 뭘 하려고 씩이나 글을 쓰는 건 아니고.


이걸 쓴다고 안 죽는 건 아닌데, 그렇고 살려고 쓰는 것도 아니지만서도.


그저 변명에, 변명에, 변명일 뿐인데.


22일 생일 아침이 되어서, 손수 시금치 된장국을 끓이고, 밥도 짓고, 김치 두루치기를 볶고, 얼마 전에 무쳐놓은 취나물과 함께 아침밥을 먹었습니다. 궁한 지갑 사정이나마 어떻게든 틈을 내서 산 케이크도 갈라 먹었지요.


그러고 나선 집밖으로 나섰습니다.


운정 호수공원 가는 산책길에 아침부터 사람들이 많더군요. 강변 산책로 옆에 잔디밭 그거 얼마나 된다고, 거기서 나물 캐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은근히 같이 하고 싶더군요. 냉이 같은 거라도 나오려나, 한 시간 캐면 2천 원어치는 캐려나.


견공들도 많고. 자전거도 많고.


그러던 중, 파랗게 핀 봄까치꽃을 봤습니다. 쭈그려 앉아 무심코 사진을 찍으며, 그 찬란함에 반했습니다.


이 작고 보잘것없는 놈들이, 뭐 이렇게 시퍼렇게 무더기로 피어 있는가.


참으로 뻔뻔하고 환하다.


봄꽃 치고는 파랗게, 눈에 띄는 색이나 하고 말이지. 의젓하게 높은 나뭇가지에 달린 것도 아닌 것이 고상한 줄기에 달린 것도 아닌 것이, 어쩜 이리 사람 발밑에 조촐하게 한 무더기 피어 있단 말인가. 이게 제 꼴이라는 듯이, 제 방식이라는 듯이.


손톱만도 못한 이 작은 풀이 뭔들 알겠습니까. 그저 따뜻하니까 피는 거고, 그저 그렇게 널브러져 있는 거고.


그저 피어 있으니까, 피어 있는 거구나. 지구의 많은 사람들이 많은 꼴로 살아가듯. 저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서. 저기는 나물도 캐고, 누구는 러닝크루 하러 나오고, 누구는 자전거 끌고 나오고. 나는 맥없이 생일상 혼자 차려 먹고 산책하러 나오듯이.


문득, 내가 쓴 글도 그랬으면 좋겠더군요.


잘 썼는지, 못 썼는지. 누가 읽을지, 안 읽을지. 부끄러운지, 아닌지. 그 책이 나인지, 아닌지.


그런 것들은 좀 나중 일로 미루고.


그저 썼으니까, 내놓고. 내놓았으니까, 거기 두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조금 뻔뻔하게.


이제 뭐 어쩔 거냐며. 나도, 이국 신전의 신도 이제 별도리가 없는 일.


나는 빛이오, 세상의 봄이로소이다— 라고까지는 아직 말 못 하겠지만. 적어도 올해는, 이 봄까치꽃만큼은 되어 볼까 합니다.


작고, 뻔뻔하게요.



박지아.

편집자. 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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