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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라는 환상을 지워가는 '어른의 길'

(13) 가을의 입구에 선 파주 출판단지를 걸으며

by 박지아

나이가 들수록 ‘어른스러움’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업무상 실수를 저지르고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상사가 말했죠.

“연차값을 못하네.”

정말 그랬습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어요.

20대의 저는 좀처럼 회사에서 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시로 찔러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악바리였죠.

그런데 요즘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숙한 행동이란 걸 점점 잃어가고 있어요.


10대에는 ‘애어른 같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는 생떼만 늘고 철딱서니가 없습니다.

아량은 줄고, 인내심도 사라지고, 깊은 생각이나 성찰은 귀찮기만 합니다.

사춘기 시절보다 더 즉흥적으로 굽니다.
하고 싶은 말은 곧장 하고, 고집도 거리낌 없이 부립니다.

말을 속으로 삼키거나 걸러내는 법이 없어졌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어째서 이렇게 거꾸로 가는 걸까요.


브런치의 작가님들과 독자분들은 어떠신지요.

몸은 늙어가는데, 마음은 오히려 퇴행하는 기분.
나이는 무심히 쌓이는데, 영혼은 무르익지 않습니다.


어쩌면 사람은 나이를 먹으며 아이로 돌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SNS에 이런 말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젊을 때 욕망을 좇는 게 좋다.
나이 들어 욕망을 좇으면 사람이 추해진다.
나이 들며 철이 드는 것이 순리지만,
철부터 든 채로 나이를 먹으면
못다 부린 성질이 한이 되어 되레 어린애가 된다.”


정말, 제 이야기죠.


KakaoTalk_20251008_214759997_05.jpg ▲ 파주출판단지 은석교 사거리에 있는 미니텔. 첫 사회생활을 저곳에서 했다.


마로니에북스에서,
박경리 소설을 편집하던 때의 이야기

모처럼 파주출판단지를 걸었습니다.

제가 무려 15년 전에 일했던 곳입니다.


그때 제가 잠시 묵었던 고시원도, 1층에 있던 편의점도, 조금 걸어가면 나오는 콩나물국밥집도, 그 옆에 작은 한옥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출판사 건물들도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다만 사람만이 바뀌고, 출판사 간판도 바뀌고, 단풍나무와 느티나무가 자라고, 억새와 칡잎이 무성해지고, 낡은 나무 벤치만이 자리를 지킵니다.


당시 저는 출판단지 초입에 있는 M 출판사에서 일했습니다.


미술서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는데, 당시에는 어쩐지 박경리 소설집을 내고 있었죠. 『토지』를 비롯해 『김약국의 딸들』 교정지를 몇 번이고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소설집 업무 전반을 전두지휘하던 대리님이셨던가, “광복만 맞이하고 나면 다시 한가위 풍경으로 돌아간다.”라며 툴툴거리곤 했지요. 한가위 풍경은 『토지』의 시작 부분인데, 완독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작업이 여간 고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인턴이었어요. 제가 한 일이라고는 교정 사항들이 수정에 잘 반영되었는지, 오탈자는 없는지 확인하는 것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편집자 업무에 재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일을 야무지게 마무리한 적이 없었죠. 선임이 “넌 대체 원고에서 뭘 보니?”라고 물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요. 저도 사실 제가 뭘 보는지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편집부 직원이 6~7명이었던가요. 20대 초반인 제가 가장 어렸고, 보통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습니다.

당시에 대학을 갓 졸업한 제 눈에는 이 편집자들이 얼마나 어른처럼 보였는지요.


그들이 건물 밖에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울 때면, 그게 마치 ‘어른 편집자’처럼 느껴졌어요. 편집자로 오래 일을 하면 담배라도 한 대 피워야 할 것 같고, 인상을 쓰면서 교정지를 보는 것도 그저 다 멋있게 보였죠.


그중에서도 일을 전두지휘하던 30대 초반의 대리님은, 몸집이 아주 산만하고 멧돼지처럼 우직하게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카리스마 있는 여자였어요. 복잡한 문장 교정도 척척 해내는 것 같고, 말 한마디를 해도 무게감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인생 다 산 것 같은 눈빛을 볼 때면 나도 저런 어른이 되어야겠다 싶었지요.


KakaoTalk_20251008_214759997_07.jpg ▲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파주출판단지. 밤이 되면 아주 깜깜해져서 무섭다.
한번 '똥폼' 잡아보기 마련인
우리네 인생


『토지』 마감이 임박할 때 무렵이었습니다. 대리님은 제가 살던 고시원에 자기도 방을 얻어서 밤을 새워가며 며칠 일을 했지요.


어느 새벽에 저와 함께 퇴근하던 날, 우리는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맥주 한 캔을 까고, 담배를 나눠 피우며 폼을 잡았습니다.


나무도 건물도 작은 새들조차 새카만 어둠에 가려져 있는 출판단지의 밤…….


여름이었는지, 그다지 춥지는 않았던 것 같고, 숨이 막힐 듯 습한 새벽 공기가 기억납니다. 차 한 대 오가지 않는 적막이 이어졌죠. 그녀가 입술을 열어 연기를 휘익 뿜었습니다.


“너는 편집자 일을 언제까지 할 거냐?”


당시 군기가 바짝 들어 있던 저는,


“되는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오래오래 해보겠습니다!”


제 대답에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다 부질없다는 표정을 해 보이더군요.


“나중에 너도 큰 일을 책임지게 될 날이 올 거야. 그때가 되면 이 무게감도 알겠지. 내가 왜 회사 근처에 고시원까지 얻어가면서 책을 만드는지를…….”


그녀의 말속에 숨은 뜻을, 20대 초인 제가 뭘 알겠습니까?


다만, 이날의 그녀는 정말 어른 같더군요.


말투도, 태도도 그럴싸했습니다.


우리 둘은 말없이 맥주캔 하나를 비웠습니다.


그때가 새벽 3시였나. 앞으로 4시간 자고 일어나 다시 회사로 들어갈 터였습니다.


저는 『토지』가 나오기 전에 그 회사를 떠났습니다. 다만 무사히 출간되었다는 걸 소식으로만 전해 들었습니다. 그녀는 실로 자신의 업무를 훌륭하게 완수한 셈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그때 그녀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녀가 느꼈을 압박감이 가늠이 됩니다. 미술서를 전문으로 출간하던 출판사에서 『토지』라는 거장의 소설을 시도한다는 건 그 자체로도 큰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임자로 30대 초반의 여성이 전두지휘한다는 것, 생각 이상으로 거대한 분량으로 인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며 출간일을 거듭 늦추면서 그녀가 느꼈을 부담감, 책임감.


그런데, 동시에 다른 것도 보이지요.


매일 담배를 피우면서 폼을 잡던 유치함.


제 앞에서 마치 인생 다 산 사람인 것처럼 폼을 잡던 허세.


소주를 마시면서 시름을 잊으려고 하던 모습들과 때로는 부장 험담을 하며 어린아이처럼 험한 말을 쏟아내는 모습들과 신경질적으로 간식을 잡아 뜯던 모습과 한 번씩 저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부리던 모습.


그때에야, 그녀가 마냥 어른 같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죠.


걔도 그냥, 30대 초반짜리 애였어.


그것도 턱없이 큰 일을 맡게 되어 초조하기 짝이 없는.


그런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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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20대, 그리고 30대.
어른을 생각하다


10대 시절, 제가 생각한 어른은 어떤 ‘상태’였습니다.


어른이라면 마땅히 인간이 인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죠. 어른은 아주 단정하고 단호한 존재여야 했습니다.


그땐 어른이란 게 일종의 ‘완성형 인간’이라고 생각했지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옳고 그름을 명확히 구분하며, 책임을 져야 할 순간에는 도망치지 않는 사람. 흔들리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자기 몫의 짐을 묵묵히 지는 사람.


20대에는 어른을 ‘조건’이라 여겼습니다.


집, 차, 결혼, 자식. 그게 어른의 자격이라고 믿었죠. 10대 시절의 환상은 깨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뭔가 있어야 어른이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요.

30대에는 직업적 성공이 어른의 조건이라 여겼습니다.


그럴싸한 명함 한 장이 곧 어른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30대 후반이 된 지금은 또 다른 생각이 듭니다.


10대, 20대, 30대 때의 제가 생각했던 '어른'이라는 존재는 사실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30대 때 생각했던 것처럼,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이 어른일까요? 그럴 리가요.


대부분은 자기 자리를 유지하며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면서요. 그저 버티는 게 어른이죠.


그렇다면, 20대 때 생각했던 것처럼 가진 것이 많아야 어른일까요?


말도 안 됩니다. 어른이라고 부를 나이가 되어서 빚만 진 사람이 태반입니다. 자기 집은커녕, 차도 없는 사람이 많죠.


그렇다면, 10대 때 생각했던 것처럼 완성형 인간이 어른일까요?


더더욱 아닙니다. 살아보니 이런 사람은 없어요.


제아무리 어른 같아도, 다 그 안에는 흔들림이 있고, 망설임이 있고.


한 꺼풀 벗겨 보면 죄 그 안에 어린애가 앉아 있더군요.


어린애. 맞아요.


이상하게 사람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안에 있는 어린애가 보이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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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안의 어린이를 받아들이며
차근차근 달래며 나아가는 어른


다들 하나같이 빈 구멍이 뻥 하니 뚫린 인생들이에요.


남들에게 보이기 싫어서 악착같이 가리고 있을 뿐, 곧 찢어질 듯 파리한 종이 한 꺼풀 안에는 죄다 어린애들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만나봤더니, 소년 같은 면모가 남아 있고.


엄청난 일을 이뤄냈다고 만났더니, 그 안에 소녀가 앉아 있더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악물고 어른인 척 탈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안에는 새파란 어린애가 점점 더 자기 몸을 키우고 있죠. 아무리 누르고 눌러도, 이 어린애가 사라지질 않아요.


‘어른스러운 어른’이 되고 싶어서 자신을 다스리려 해도 이 어린애 때문에 도무지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자기 몫의 짐을 묵묵히 지기는커녕,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죠. 매일같이 감정은 흔들리고, 불안하고, 자꾸 울컥합니다.


감정이란 게 나이와 함께 둔감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예민해지고 잘게 갈라진다는 걸 이제야 압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감정이란 게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 것인지’를 알아가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릴 땐 절제와 이성이 어른의 증거라 여겼지만, 이제는 감정이 많고 미련이 남고 후회가 많은 사람이 오히려 더 어른스럽게 느껴집니다.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더 어른처럼 느껴져요.


나이가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어린아이인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그보다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더 어른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조금씩, 서서히, 아이인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어른이 되는 일 같아요.


씁쓸하게도 말이지요.


"내가 이제 어른이 되었구나!"가 아니라 "아직도 내가 어린애구나." 그런 결론.


그런 이상한 결론이, 파주 출판단지의 가을 속에서 돌연 나타난 것입니다.


KakaoTalk_20251008_214759997_02.jpg ▲ 이 말이 맞긴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책을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그 이하의 뭔가지.


나이가 드는 일,
어른이라는 환상을 지워가는 일


파주 출판단지의 바람 속에서 문득 그녀를 떠올립니다. 피우던 담배 연기와 함께 흩어졌던 그 새벽을 떠올립니다.


십몇 년이 지난 후에도 저는 이런 것이나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다니, 어린애가 따로 없어요.


그분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요?


소식이 영 끊겨서,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나이가 든다는 건 어른이 되어가는 게 아니라 어른이라는 말에 담긴 환상을 하나씩 지워가는 일이라는 거겠지요.


우리는 어릴 적부터 어른이 되면 모든 게 분명해질 거라 믿었습니다. 감정은 정리되고,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며, 실수조차도 지혜로 덮을 수 있을 거라고요.


하지만 살아보니, 그 ‘어른’이라는 이름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모호함이 있었습니다.

감정은 여전히 요동치고, 선과 악의 경계는 흐릿하며, 지혜는커녕 어제의 후회와 내일의 두려움만이 쌓여갑니다.


그래서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건 무언가를 새로 배우는 일이 아니라 틀렸던 믿음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완성된 어른을 꿈꾸던 시절의 환상을 걷어내고, 불완전한 자신을 인정하게 되는 일.


그게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는 뜻일지도요.



박지아.

편집자. 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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