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삶이 우리에게 충분히 관대하지 않더라도
참 오래간만에 브런치에 들어옵니다.
오늘 저는 지금 몸 담은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일합니다.
그토록 고생을 하고, 이렇게 또 도망치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느 드라마의 제목처럼 <도망치는 건 때론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편집부 동료들에게 전할 인사를, 브런치에도 나눠봅니다.
두 번째 화살을 조심하라
저는 말을 잘 못해서 글로 전달하려 합니다.
말로 하면 늘 오해가 생기더군요.
급하게 써서 구구절절 매끄럽진 않지만,
그래도 1년간의 성의를 몇 마디 말로 흘려보내긴 아쉬워서 이렇게 씁니다.
제가 이 회사에 들어와 처음 만든 원고가 전겸구 박사님의 <스트레스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며 사는 법>이었습니다.
책 중에 이런 부분이 있어요.
<두 번째 화살을 조심하라>
당시엔 멋있는 사진을 고르느라 바빠 깊이 새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직서를 내고 며칠 뒤 새벽에야 그 말이 불현듯 떠오르더군요.
두 번째 화살은, 불경 중 <잡아함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 화살'은 삶에서 피할 수 없이 찾아오는 고통을 말합니다.
'두 번째 화살'은 그 고통에 대한 반응, 즉 원망이나 슬픔 같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의미합니다.
즉, 두 번째 화살을 조심하라는 말은,
삶에서 어쩔 수 없는 고통을 마주하더라도, 여기에서 파생된 감정으로 자신을 괴롭히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때로는 정신승리를
때로는 농담을
생각해 보면,
저는 첫 번째 화살을 맞을 때마다, 늘 자기 스스로를 향해 더 모진 두 번째 화살을 쏘는 사람이더군요.
사실, 편집업의 특성상 자책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진상 저자 같은, 어쩔 수 없이 맞는 화살도 분명히 있지만,
솔직히 내가 더 잘했더라면, 내가 더 꼼꼼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의 비율이 더 많거든요.
이게 사실이기 때문에, 저는 자신에게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더 세게 겨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두 번째 화살을 생각하던 새벽에, 저는 돌연 정신승리라는 단어를 떠올렸어요.
정신승리가 무엇인가.
루쉰의 소설 아Q정전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태도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나쁜 상황을 현실과 다르게 왜곡하여 스스로 정신적 위안을 얻는 행위로,
실제로는 패배했지만 자신은 이겼다고 자위하는 자기 합리화의 한 형태를 의미합니다.
농담이나 장난 같기도 한 진지하지 못한 현실인식이지요.
저는 아큐정전이라는 책도 싫어하거니와, 이 단어도 정말 싫어합니다.
저는 아무리 힘든 상황에도 핑계 대지 말고, 책임감 있게 자신의 능력을 파악하고,
상처를 고스란히 떠안아 아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상황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진지하게 해석해서
더 현실적인 대처방안을 준비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싫어하던 정신승리 같은 단어가 떠올랐을까.
그건,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법과, 정신승리라는 단어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맥락은 다르지만, 둘 다 인간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고통을 변형하는 방식이니까요.
그날 새벽, 저는 스스로에게 정신승리가 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정신승리를 얕보고 부끄럽게 여겼지만,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걸 갑주로 둘러야 한다고요.
느슨한 자기 위로와 현실 도피야말로 살아남기 위한 비책이 아닐까.
샘솟는 긍정성과 자신에 대한 믿음과
영혼 없는 반성과 유연한 남 탓,
더불어 두 번째 화살을 왜곡하고 휘어버릴 수 있는 농담이야말로
평범한 인간이 고된 사바세계를 살게 하는 비법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신승리란 패배를 승리로 둔갑시키려는 얄팍한 수작이 아니라,
내가 살아 숨쉬기 위해서 선택하는 진통제가 아닐까요.
가령 편집일에 적용하자면, 이렇겠지요.
"꼬우면 니 책 니가 만드시든가."
"처음부터 니가 잘 쓰시든가."
"너도 번역기 돌린 거잖아."
"어쩌라고요?"
"저도 밥값은 했는데요?"
"개떡같이 쓴 글을 어떻게 찰떡같이 만들라는 거예요?"
"문제 있으면 많이 많이 파셔서 2쇄 찍으세용!"
뭐, 이 정도의 정신승리를 나 자신에게 허락하는 일.
결국, 우리가 사는 법은 날아오는 화살 끝에 붙은 넉살을 찾아내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2쇄, 3쇄로 이어지고
좌우간 이걸로 저는 이 회사에서의 1년간 생활을 마무리 짓습니다.
계속 편집자로 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전에 말씀드렸던 단독에세이집은 투고에 성공해서
다른 출판사와 작업 중입니다.
저에게도 담당 편집자라는 감사한 존재가 생겼는데,
저자가 되어보니 느껴지는 것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편집자, 대리, 이사님, 사장님으로 불리고 싶진 않아요.
언젠가 작가님 혹은 선생님으로 불리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지금 이 흔들림이 오히려 변화의 적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각자 불리길 원하는 호칭이 있을 겁니다.
앞으로 부장님이나 이사님으로 불리고 싶은 야망 있는 사람도 있을 거고,
영원한 연인이나, 혹은 아빠, 엄마로 불리고 싶은 사람도 있을 거고.
지금 상태를 쭈욱 유지하며,
그저 자기 이름 석 자면 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길이 꼭 그렇게 술술 풀리진 않겠지요.
앞으로 우리의 삶은 교정지처럼 빨간펜으로 뒤덮일 수도 있고,
장기 지체 원고처럼 기약 없이 묵혀지는 날도 있겠지요.
편집자로 10년간 살면서 배운 게 있다면, 세상에 ‘완벽한 원고’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교정지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지막에 꼭 오탈자 하나는 남아 있듯이, 인생도 늘 구멍 하나쯤은 뻥 뚫려 있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다른 원고를 열고,
“꼬우면 2쇄 찍으시든가요” 같은 농담을 던지며 살아남을 겁니다.
저는 오늘 전 직장 동료와 술 한잔을 하러 갑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회사 이야기를 늘어놓고, 적당히 취해 일어나겠지요.
그리고 지난 1년간 퇴근하던 길을 따라 마지막으로 퇴근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도, 앞으로 이어질 긴 여정에도
넉살과 웃음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편집자라는 일이 무수히 첫 번째 화살을 맞는 직업이라면,
두 번째 화살만큼은 스스로에게 관대하게 비껴가길 바랍니다.
수많은 오탈자와 오류를 안고서,
우리 삶도 2쇄, 3쇄로 이어질 테니까요.
모쪼록 행복하시길.
좋은 일이 많지 않더라도,
삶이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충분히 너그럽지 않더라도
스스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
박지아.
편집자. 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