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살아 있음'이라는 연기
밥을 많이 먹고 싶습니다. 위장을 가득 채우도록.
그 안에 술을 붓고 싶습니다. 뇌가 흠뻑 젖을 정도로.
그러고 나서 울고 싶습니다. 뼈가 부서지도록.
마지막으로 팔등으로 코를 쓱 닦고 걷고 싶습니다.
담담하게, 묵묵하게, 무한히 멀리 나아가며.
나도 사람이야
당신은 몰랐겠지만
2주간 글을 전혀 못 썼습니다. 죽을 사람이 글은 뭐 하러 쓰겠습니까. 유서나 몇 줄 남기는 게 낫겠다 싶었죠.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지독하게도 더 버텨보겠다고, 내가 여기서 무너질 수 없다는 악바리가 살아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교수 몇 명 때문에 내 생업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죠.
그런데, 직장을 붙잡는 것도 집착이다 싶었습니다.
때론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손을 터는 것도 현명한 선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엔가, 차분하게 생각해 보니,
"교수 이름 세 글자 쓰고 자살한다"도 우습고,
"죽이고 나도 죽는다"도 어이없더군요.
왜 자꾸 죽음으로 해결하려 할까.
아마도, 약자가 강자를 이겨먹을 방법이 목숨을 거는 것 외엔 없기 때문 아닐까.
그러나 유서를 쓰고 영상을 찍고 목숨을 걸어도, 강자가 무너지는 일을, 나는 본 일이 없는데.
죽지 말고, 차라리 전화라도 걸어서 소리치고 싶더군요.
"나도 사람입니다!"
"나도 사람이라고요!"
"개새끼야! 나도! 너랑 똑같은! 인간이라고! 씨발놈아!"
이 역할극에서
탈출하는 법
전의 글에 작가님 한분이 좋은 댓글을 달아 주셨습니다. 사회생활은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라고요. 정말 현명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모든 일에 진심으로 나 자신을 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연극을 하듯이, 가면을 쓰듯이 진심은 저기 버려두고 적당한 요령으로 남을 상대하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우리 세상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이미 정해져 있으며, 그건 우리가 역할극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라는 역할.
자식이라는 역할.
애인이라는 역할.
사장이라는 역할.
노동자라는 역할.
각각 주어진 역할이 있고, 이 역할 안에서 다양한 캐릭터가 있지요. 각 역할벌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행동방식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연기 지침서죠. 우리는 이 지침서를 따라, 약간의 개성을 가미하며 캐릭터를 연기하며 삽니다.
그래서 부모는 부모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애인은 애인답고, 사장은 사장답고, 노동자는 노동자답습니다. 이 연기에서 벗어나면, "답지 않다!" 하는 비판을 받거나, 운 좋으면 칭찬을 받게 되는 거지요.
생각보다, 우리는 '스트레오타입의 인간', 'ㅇㅇ다운 인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무의식 중에 여기에 맞춰서 연기를 합니다.
신입 사원의 행동, 중간급 직원의 행동, 상사가 되어서 할 행동 등등. 모두 스스로 시나리오를 짜고 캐릭터를 설정해서 이대로 움직이죠.
어떤 행동을 하다가도, "이 행동은 정말 좋은 직원다운 건가?"하고 멈칫하게 되지요.
"엄마답게 행동하자." "자식답게 행동하자." "노동자답게 행동하자."
어떤 규준이 나를 붙잡습니다.
이런 걸 생각하면, "나다움"이라는 것도 참으로 추구하기 어려운 무언가 같습니다.
"나답게 살자."
그건 대체 뭘까요?
이렇게 살면, 이 역할극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요?
이 직장에서 나가면
너는 그냥 아저씨, 나는 그냥 아줌마
직장 생활 내에서도 역할극은 계속됩니다..
너는 교수, 저자, 갑.
나는 편집자, 보조자, 을.
지시를 내리는 역할, 요구하는 역할.
지시를 받아들이는 역할, 부탁하는 역할.
그런데, 자꾸 교수 역할이 선을 넘습니다. 자신이 해야 하는 선 이상으로 더 과한 연기를 하려 들어요. 무리한 요구를 하고, 고집을 부리고, 편집자에게 폭언을 합니다.
이 역할극 속에서 저는 약자이기 때문에,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연극의 규칙이니까요.
이 연극을 잘 해내는 값으로 월급을 받으니까요.
그렇다면, 더는 이 연기를 못하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될까요? 내가 하는 연극만큼 월급이 많지 않다고 느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번아웃으로 지친 을인 제가 역할글을 그만두면 어떤 일이 생갈까요?
간단하죠.
교수 역할 끝. 편집자 역할 끝.
그러면 갑도 을도 없죠.
교수는 지나가는 아저씨 1이 되고, 저는 지나가는 여자 1이 됩니다.
아무런 접점도 없고, 서로 화낼 일도 싫을 일도 없는.
처음부터 무관했던 사람들.
연기는 끝나고 막은 내립니다.
저도 회사라는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다른 연기할 곳을 찾아, 연기로 먹고살 곳을 찾아.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일들 속에서
얼마 전에 정신과를 다녀왔습니다. 두 달만의 방문이었지요. 혹시라도 선생님께 놓치고 못 전하는 증상이 있을까 봐 종이에 써서 갔습니다. 읽으면서도 제가 걱정한 부분은 따로 있었는데, 주치의 선생님은 제가 사소하다고 판단한 부분을 지적하셨습니다.
"술을 끊으세요."
저는 딱히 술이 저에게 해를 끼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요. 술은 나의 사이좋은 친구고, 나의 위로이며, 저녁의 휴식이거든요. 술을 끊으라고? 절대 그건 안 된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진정제 한 통을 드릴게요. 술을 마시고 싶으면 진정제를 먹고 주무세요."
로라팜이었습니다. 전에도 한번 불면증 때문에 먹어 본 약인데, 효과가 썩 좋았지요.
이어서 심리상담사 선생님도 찾아갔습니다. 저를 3년 이상 상담해 오신 상담사님은 최근의 이야기를 듣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지아 씨가 건강한 게 우선이에요. 지아 씨, 자신만 생각해요."
저는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저 자신만 생각하기란 어렵죠. 이 세상이 요구하는 건, '저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수님의 일을 내 일처럼' '회사의 일을 내 일처럼'. 나는 나 자신만 생각할 수 없어요. 나는 모든 욕심쟁이들에게 종속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술은 끊어요."
역시나.
또 술 얘기입니다. 나는 너무 좋아하는 이 액체를 왜 다들 끊으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 맛있고, 기분 좋고, 느슨한 맑은 물을 포기하느니 정말로 그냥 미쳐서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끊으라고 하니까 끊어야겠고, 바로 끊기는 어려우니 줄여야겠다, 하면서도 어제도 막걸리를 한 병 마셨습니다.
폭언, 폭언,
방어막 없는 회사생활
"이건 수습생을 데리고도 할 수 있어! 일 잘하는 수습생이면! 그런데 여기 있다는 인간이!"
뭐, 좀 문제가 있었죠. 새 판 작업을 하는데, 조판작업자 분이 본문 몇 장을 깡그리 날리시고, 디자인도 엉망으로 주셨나 봅니다.
욕은 욕대로 얻어먹고, 망신은 망신대로 당하고,
뭐, 그런 날이니까. 막걸리를 또 한 병 사서 집으로 들어갔지요.
9시까지 야근할 때까지도 실실 웃었는데, 집에 들어가자마자 눈물이 쏟아지지 뭡니까.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대성통곡을 하고 꺼이꺼이 숨이 넘어갈 듯 울었습니다. 수도꼭지라도 켜놓은 것 마냥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서 씻기도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이사님께, 더 이상 못 버티겠다고 문자 한 줄을 보내고 진정제를 먹었습니다.
막걸리를 비우며 생각했지요.
아,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이것만큼은 정말 어렵구나.
현재진행형,
이어지는 사막
이제 진지하게 사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반려가 될지도 모르고, 하는 일이나 마저 하고 가라고 발목이 잡힐지도 모르겠습니다. 10월 연휴를 기다려서 그때까지만 일할까 하는 교활한 생각도 잠시 해 봅니다.
여전히 일은 난립해 있습니다. 산에 장작이 한 무더기 쌓여 있듯이. 이제 솔직히 제가 쳐내기에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현재의 제 업무량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미 너무 피곤하고, 글자를 읽기도 어렵습니다.
부장님이나 이사님과 이야기를 해 봤지만, 조절해 주겠다는 답만 들었습니다. 좋으신 분들입니다. 저분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죠.
그나마 어제는 제 책의 1교 원고를 넘겼습니다.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원고 디자인 들어가면 다시 한번 봐야겠지요. 이 책에 많은 걸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내가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첫 작품이 유고작이 될 수는 없으니까.
어느 날, 힘이 너무 빠져서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데 불현듯 밥을 많이 먹고 싶었습니다.
아주 맛있는 흰쌀밥을, 고기랑 된장찌개랑 해서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마음껏 먹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꽉 찬 위장 속에 술을 붓고 싶었습니다. 넘실넘실 가득 차도록. 뇌가 부들부들해지도록.
그러고 나서 대성통곡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늘이 떠나갈 듯, 땅이 꺼질 듯 울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울고, 팔등으로 눈물과 콧물을 슥 닦은 후 일어나고 싶었습니다.
머리를 곧게 들고, 앞을 향해 걷고 싶었습니다.
밟히고 치여도, 깨지고 으스러져도. 너덜너덜하면 너덜너덜한 대로.
담담하게, 묵묵하게, 무한히 멀리 나아가며.
박지아.
편집자. 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