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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범람하는 날

(8) 다시는 숨 쉬는 것으로 태어나지 않기를

by 박지아

무서운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저자 이름 세 글자를 써놓고,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목을 매는 상상.


머릿속에서 수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해 봅니다. 물론 실행 가능할 리는 없습니다. 저는 그럴 배짱도 없고, 용기도 없죠. 그저 생각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공상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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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유서를 쓰는 기분으로
브런치에 글을 올립니다


문제가 되는 책은, 5개월 전에 만든 책입니다.


애를 먹은 책이었죠. 번역서였습니다. 그런데, 번역기를 돌려서 온 티가 팍팍 나는 책이었어요. 원고의 중후반부에서는 번역기 흔적을 정리하지도 않았더군요.


편집자인 제가 원서를 가지고 디플과 챗GPT를 가지고 어떻게든 번역을 다듬으려 애썼습니다. 7교까지 갔지요. 가는 과정도 쉽지 않았어요. 첫 교정에서 반을 들어 엎고, 두 번째 교정에서 70%를 다시 썼습니다. 3, 4, 5, 6교에서도 이런 식이니, 저도 교정을 볼 여유가 없더군요.


납품 기한을 맞춰야 하는 책이었거든요.


그런데도, 인쇄 일주일 전까지 PDF로 주석으로 달린 수정이 3,000개가 왔죠.


인쇄 하루 전에는 400개가 왔습니다.


그런데 5개월이 지난 지금, 마지막 교정 내용이 책에 반영이 되지 않았으니, 지금까지 나온 책을 파기하고 수정해서 다시 내겠답니다. 그 수정이랍시고 번역을 다시 했더군요.


그리고 출판사에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제가 잡지 못한 오탈자 6개였습니다.


편집자가 6개를 잡지 못했으니, 출판사의 잘못이다.


그러므로 이미 출판된 책 400부를 파기하는 비용, 책값 50% 이상을 출판사가 부담해라.


650만 원.


사채까지 쓰고 있는 자기 형편에는 못 내겠다는군요. 편집자인 제 책임이니, 저더러 상부에 말해서 값 좀 깎아 보랍니다.


저는 상부에 줄줄이 불려 갔습니다.


부장님, 이사님, 부사장님, 사장님.


다들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6개 틀린 네 책임이다."


이에 대해, 저는 더는 글로 옮기지 않겠습니다.


가끔은, 유서를 쓰는 기분으로 에세이를 씁니다. 온라인에 기록이 남는다면, 무엇이든 증거로 쓰일 수 있겠지요. 그런 희망으로 이번 글도 브런치에 올립니다. 제 독자 1,200명 중에서 누구 한 사람이라도 기억해 준다면, 제 글에 라이킷을 눌러주시는 매회의 분들 중에 한 분이라도 이 글을 기억해 주신다면.


이 글은 어떤 혐의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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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다리 아래를 보며


한강이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택시를 타고 양화대교를 건넜습니다. 다리 아래로 시퍼런 물이 출렁이고 있더군요.


옛날에 저 물을 오랫동안 지켜본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출판사에 다닐 때였어요. 교정에 문제가 있었죠. 점심시간에 홀로 양화대교로 향했습니다. 소주 한 병을 끼고, 가만히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어요.


물이 가득 차 있는 모습이 비현실적이더군요.


넘실넘실, 흐르는 것 같지도 않으면서, 물의 표면이 삐죽하게 솟아 나왔다가 또 가라앉았습니다. 물의 껍질 아래에 공기가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더군요. 저 아래에는 빡빡한 물만 가득하고, 어둠이 가득하고,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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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숨 쉬는 것으로는 태어나지 마소서


언젠간 이런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한강은 거대한 묫자리라,

흰 팔들이 올라온다

흰 다리들이 올라온다

젖은 입술로,

숨 좀 쉬게 해 주시오

부귀영화 다 필요 없으니

일확천금 다 필요 없으니

부디

오늘 하루만 좀 살게 해 주시오

오늘 하루만 먹고살게 해 주시오


더 쓰지를 못해서 한강에 던져버렸습니다. 제 시를 안고 넘실넘실 흘러가는 한강의 끝은 어디일지, 가끔 찾아오는 갈매기들이 그 풍경을 알고 있을지, 혹은 물결에 실려 떠밀려가 버린 사람들이 알고 있을지 나는 모를 일입니다.


한강 위에는 요트가 떠다니고.


곳곳에 있는 섬에는 무성하게 나무들이 자라고.


강변에는 자전거가 따르릉 지나가고, 편의점이 있고, 주차된 차들이 있고, 한강물을 빨아먹고 사는 나무들이 자라고, 그 나무 아래로 작은 날벌레들이 윙윙거리고, 그리고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손가락, 머리카락, 목덜미, 눈, 동공 안에 깃든 어둠 같은 밤.


밤의 강을 가르고, 현란한 조명을 단 크루즈가 지나가고, 무대 공연장에서는 무지갯빛으로 조명이 바뀌고, 쭉 뻗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 오색 조명의 눈부신 빛들, 그 빛들이 강 위로 복사되고, 그 위에 고스란히 담긴 도시의 복제품.


강 아래에도 사람이 삽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


크게 상심한 사람.


뭔가 포기한 사람.


사는 게 지긋지긋한 사람.


삶이 힘든 사람.


영혼이 지친 사람.


그저 외로운 사람.


깊게 상처 입은 사람.


매 순간이 괴로운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절명한 사람들.


강 아래에 잠긴 차갑고 고요한 서울에서, 그 사람들이 옹기종기 살아갑니다.


저는 영혼들의 목소리를 들을 듯, 듣지 못할 듯.


어두운 밤의 한강을 걸으며, 술 한 잔으로 떠나간 이들의 넋을 불러 봅니다.


가소서. 한강을 타고 먼 곳으로.


돌아오지 마소서. 이 세계로 두 번 다시는.


살아 있다는 건 고통이고, 험한 일이오니, 부디 다시는 숨 쉬는 것으로 태어나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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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범람하는 날


오늘도 비가 내리지요.


언젠간 보았던 한강의 범람이 떠오릅니다.


갈색 물이 도로를 삼킨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지요. 이상하게 속이 후련한 풍경이었습니다.


한강이 범람하면, 그런 날이 온다면,


강 아래에 옹기종기 살던 죽은 이들도 강변의 억센 나무뿌리를 붙잡고 기어 나올 것인지.


기어코 악착같이 흙을 딛고 살아볼 것인지.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비는 덧없이 내리고, 저는 또 여기에 있습니다. 이번 달에만 책 3권을 더 내야 합니다. 이것들도 모두 납기가 있는 책이라, 도망칠 수도 없지요. 일은 손에 잡히지 않는데, 사표는 수리되지가 않고, 처량하기만 합니다.


마음속에 한강을 품고. 넘실거리는 나의 묫자리를 품고.


불확실한 절명의 꿈을 꿉니다.


구질구질한 숨을 쉬며, 또 쉬면서.





박지아.

편집자. 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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