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는 필요없는 뜨내기
수녀원에서 뛰쳐나온 날
저는 수녀원에 잠시 있었어요. 수녀가 되려고 했거든요. 입회식도 했죠.
그러나 나왔어요. 아주 잠시 머물렀다가.
수녀원에서의 기억은, 어쩐지 흐릿하고 아련합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해요. 워낙 짧았으니까. 다만, 수녀원을 나올 때의 풍경은 생생합니다.
푹푹 찌는 여름이었죠. 7월 초였을 겁니다.
저는 캐리어 하나를 끌고 비탈길을 내려왔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옷가지의 전부였죠. 그 외에는 십자고상, 십자상, 묵주, 성모상, 성무일도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비탈길이 끝난 도로의 끝에는 사람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모든 소리가 섞여 왁자지껄한 버스 정류장 앞, 깜빡이는 신호등, 부웅 매연을 뿌리며 나아가는 자동차, 비틀거리는 버스, 축 늘어진 가로수들, 휴대폰 대리점에서 나오는 음악소리와 어디론가를 향해 끝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또 사람들.
땀 흘리는 사람들 속에 서서 저는 눈알을 좌우로 도르륵 굴렸습니다. 이게 사람이 사는 세상이었죠. 이게 세속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예수도 없고, 마리아도 없고, 날개를 단 가련한 천사들도 없고, 성인도 없었죠. 오직 뙤약볕을 견디며 땀 흘리는 사람들과 그들이 내는 땀냄새와 끈적함하게 달라붙은 셔츠가 전부였죠.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냥 막연한 겁니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하나.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에 월셋집을 처분했죠.
당연히 가구도 다 처분했어요.
소중한 물건이나 보석들도 다 팔아버렸죠.
통장도 정리했습니다.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도 한 장 없었죠.
저에게 있는 거라곤 되돌려 받은 휴대폰 하나,
그것도 전에 해지해버린 번호 대신 새로 부여받은 낯선 번호 8개.
대충 그런 게 재산의 전부였습니다.
서울에 발가벗겨져서 홀로 내던져진 기분이었죠.
이걸로 뭘 하고 살 수 있을까.
좌우간 뭔가를 하고 살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래서 대체 뭘 할 것인가.
어디에서부터 시작할까.
어떻게 시작할까.
나는 지금 인생의 선 어디에 서 있는 걸까.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 제가 있었습니다.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누구도 나에 대해 수군거리지도, 말을 걸지도, 인사를 건네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수녀원에서 갓 튀어나온 저는 그렇게 서 있었지요.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비웠던 날
그냥, 어제는 수녀원에서 뛰쳐나온 날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드와인인 무통 가데가 저렴하게 편의점에 나왔더군요. 아주 좋아하는 레드와인이라, 방구석에 앉아 홀짝이는데, 사람 집 꼴이 아니더군요.
이 집에 이사 온 지는 두 달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빨리 이 집을 떠나고 싶었어요.
이사 준비를 했습니다.
구질구질한 모든 게 이 집에서 시작된 것만 같아서.
이 집에 들어오면서 새로 샀던 화장대, 선반, 테이블, 소파, 침대 프레임...... 모두 다 '당근'해버렸습니다. 필요한 사람들이 몽땅 가져갔어요.
이게 옳겠죠.
저는 더 이상 그 물건들을 쓰지 않으니까. 나에게는 필요 없는 거고. 이 물건을 가져가려는 사람들은 이 물건들이 필요한 거니까. 이 물건들은 자신들을 필요로 해주는 곳에 가는 거고.
저는 물고기 떼들에게 먹이를 뿌려주듯,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눴습니다.
언제 명절엔가 받은 스팸세트
링피트 세트와 게임 칩 몇 개
화장품용 냉장고
박스도 뜯지 않은 가습기
읽지 않은 책
더 이상 쓰지 않는 향수
짝퉁 명품가방
등등.
모든 것을 무료로 나눠주었습니다. 가져갈 이들이 가져가도록.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그 물건들이 자리 잡도록.
반대로 말해, 그 물건들이 있어야 할 장소는 제 근처가 아니었던 거겠죠. 처음부터 그랬든, 어느 순간부터 그랬든, 떠나야 할 운명이었던 겁니다. 저는 그들을 멀리 보냈어야 했던 겁니다.
보낸 것은, 물건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도마뱀들도 멀리 보냈습니다.
35마리 도마뱀,
저는 35마리 도마뱀이 마치 제 정체성 같다고 느꼈습니다. 정체성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왜냐하면 수녀원에서 나온 이후, 내가 처음으로 사들인 생명체였으니까.
첫 도마뱀, '녹두'를 만난 날
수녀원에서 나오고 한 달 정도 지난 후였을 겁니다.
간신히 구한 봉천동 1.5룸, 보증금 4천에 37만 원짜리. 방안에 뾰족한 삼각형 모서리가 두 개나 있는 방이었죠. 그날 저는 파충류 박람회에 갔습니다. 딱히 뭔가를 사러 간 건 아니고, 파충류의 냄새나, 특유의 습한 공기나 행사장에 있을 개성 있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련 싶었던 거지요.
그런데, 거기서 본 겁니다.
상자에 들어 있는 도마뱀들을요.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죠. 별 상품 가치가 없어서 쌓여 있는 놈들이었음을. 대충 케이지와 함께 빨리 팔아치워야 하는 악성재고였음을.
저는 그 악성재고가 마음에 들었던 거죠.
몇 마리를 빤해 봤어요. 모프(가죽) 같은 건 알 리도 없고. 그저 도마뱀의 눈만 바라보았죠. 오직 눈,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 눈이 아름다운 도마뱀을 갖고 싶었어요.
그렇게 기어이 고른 거죠.
7만 원에 도마뱀이 살 집 + 사료까지 포함된 한 세트를.
상점 주인이 말하더군요.
"아침저녁으로 물을 뿌려주면 되어요. 사료는 물에 개어서 주면 되고요. 3일에 한 번씩 먹여줘도 괜찮아요. 청소는 적당히 더러워질 때 한 번씩 치워주세요. 바닥재는 키친타월이 좋아요."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게 전부였죠.
박람회장을 나올 때, 습한 공기 때문이었는지 머리가 빙 돌았습니다. 어쩌면 8월의 더위 때문일지도요. 택시를 잡기 위해 걸음을 옮기며, 저는 손가락 끝으로 달랑이며 잡고 있는 검은 비닐봉지 안을 살폈습니다.
그 안에는,
초록색의 두 눈동자!
크고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녹색의 자상한 눈!
그렇죠.
이게 제 첫 번째 도마뱀,
녹두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나를 지탱하는 건 없어
그렇게 시작된 거죠. 도마뱀을 모으는 일이. 35마리나 모았죠. 어떤 녀석은 사정이 있고, 또 어떤 녀석은 어쩌다가 생기게 됐고, 또 어떤 녀석은 유독 골치를 썩였고, 어떤 녀석은 사람 손도 잘 타고 귀여웠죠. 어떤 놈은 수필의 주인공이 되었죠. 곧 발간할 책의 1장을 차지했죠.
아주 비싼 놈들도 있고, 아주 저렴한 놈들도 있고.
이 브런치매거진 [1화]에서 썼던 것처럼 35마리를 사랑으로 키웠더랍니다.
왜냐하면, 내가 도마뱀이고, 도마뱀이 나였으니까.
내가 의지하는 건 이 도마뱀들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 도마뱀을 모두 정리했습니다.
딱 한 마리 녹두만을 남긴 채.
나머지 도마뱀들에게 새로운 주인을 찾아 주었어요. 내 물건들이 원래 내 것이 아니었듯이, 내 도마뱀들도 원래 내 것이 아니었고, 제대로 된 자리를 찾아간 거겠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보내고 나서 펑펑 울었습니다.
마음을 지탱하던 34개의 골재가 다 빠져버린 듯, 완전히 무너져버린 듯, 가슴을 치며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왜 도마뱀을 보냈어야 했을까요?
그건 더 이상, 내가 나를 지탱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35마리 도마뱀이 있으니까, 이들을 먹여 살리려면 살아야 해!"
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아, 포기하고 싶어라.
큰 삶도.
작은 삶도.
살아야만 하는 삶도.
짐이 있는 삶도.
살아야 하는 이유도.
다 훌훌 떠넘긴 채, 그렇게 홀로이고 싶구나.
수녀원에서 나왔던 그때처럼.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고, 오직 나만 서 있었던 그때처럼. 그 자리에는 신도 없었고, 섭리도 없었고, 은혜도 없었고, 기도도 없었고, 오직 더위와 왁자지껄한 소음만이 있었던 시절로.
그리고 내가 데리고 온 단 한 마리 도마뱀이 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수녀원에서 나온 게 4년 전이니, 4년의 세월을 저는 모두 흘러 보냈습니다.
잘 가요, 내 인생.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내 인생.
아름다운 곳으로 가셨으려나
아름다운 곳에 있으시려나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그렇다고 다른 브런치 매거진을 쓰긴 싫어요.
어차피 내가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쓰는 것도 아니고. 일기처럼 쓰고 있는 것이니. 그저 도마뱀 34마리가 사라졌고, 그게 전부인데 굳이 다른 매거진을 열 필요가 없잖아요?
대신 다른 이야기를 좀 하고자 합니다.
새 집을 구했어요.
지금 있는 집보다는 아주 작지만, 500에 50. 제 형편에는 아주 적절한 원룸 복층이죠.
그리고 머리카락을 싹둑 잘랐습니다.
왜들 고난을 끝낼 때면 머리카락부터 자르는지 모르겠어요. 일종의 세리머니 같은 건데, 저도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떨어져 나간 머리카락처럼, 제 불운도 떨어져 나가길 바라면서요.
옷도 많이 버렸습니다.
안 입는 옷, 입기 싫은 옷. 깡그리 주워다가 쓰레기봉투에 집어넣어 버렸죠.
눈에 거슬리는 것들은 모두 쓰레기봉투에 넣고, 냉장고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모두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넣고, 깡그리 한판 정리한 후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거실에 대자로 뻗었습니다.
눈을 감자, 수녀원에서 나왔을 때 보았던 그 풍경이. 그 풍경이 끝없이 떠오르더군요.
많은 물건을 정리했지만, 십자고상은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신부님께 받은 것인데 이것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볼 때마다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성모상이 있지요. 다미아노의 십자가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투박한 나무 묵주.
수녀원을 나오던 날, 제 지도 수녀님께서 잘 살라며 주신 그 묵주가 희고 정갈한 수건 위에 놓여 있습니다.
아, 베로니카 수녀님.
잘 살고 계실까요.
사무엘 수녀님, 루아 수녀님.
저를 돌봐주시던 별같이 아름다운 수녀님은 오늘도 거룩한 기도를 올리시고, 자박자박 그 고운 걸음으로 그녀들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셨으려나. 그녀를 필요로 하고,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그곳에 가셨으려나.
참 예쁜 사람들.
가련한 사람들.
나는 그리운 수녀님들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손등으로 이마를 탁탁 쳤습니다.
잠시 탁탁 치다가, 이윽고 뺨으로 내려와 뺨을 후려쳤습니다.
짝!
짝!
짝!
아무리 때려도 아프지 않고, 아무리 때려도 정신이 드는 것 같지 않고.
아이고, 미친년아. 죽어라, 죽어라, 죽어버려라! 소리치며.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나는 어디로
어제는, 회사에 신입이 둘 들어왔지요. 보통 신입이 들어오면 대리가 돌아가면서 사수를 맡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사수가 될 차례였는데, 다른 사람이 맡게 되었어요. 이유를 물어보니 '제가 불안정해 보여서, 우선은 너 자신이 안정이 되거든 담당할 사수를 붙여주겠다'라고 하더군요.
명백한 열외였죠.
쓸모가 없다는 겁니다.
아마도 내년 과장 승진에서도 누락되겠지요. 별수 없다 싶었습니다.
아, 아무 데에도 쓸모없는 나.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나.
도마뱀 34마리조차 내 곁을 떠나는 나.
나요.
나라는 이 슬픈 외로움이여.
신의 곁에도, 사람의 세상에도 살 수 없는.
신도 필요로 하지 않고 사람들도 필요로 하지 않는.
뜨내기
누군가 기도조차 해주지 않는, 허름한 떠돌이여.
박지아.
편집자. 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