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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민 Apr 26. 2023

151~165

151

이루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뭘 해야 될지 모를 때는 눈앞에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 보자. 


152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는데 내가 쓰지 않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좀 더 좋은 글을 쓰고 싶고 계속 쓰고 싶다. 나만을 위해 쓸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런 글


153

‘월급은 통장을 스치고 지나간다’지만 그게 ‘생필품’으로 휩쓸고 지나간 자리라면 제 아무리 월급날이라도 현타가 세게 온다


154

나도 내 속으로 자식을 낳아 보니 알겠다. 나란 사람이 얼마나 이 사회의 모든 아이들에게 관심과 여유가 없었는지. 최소한의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대했는지. 그리고 그 ‘최소한의 여유’라는 것이 모이면 어떤 사회가 될지. 나는 그동안 나 자신, 1인분의 책임을 방기 했었다. 이제부터라도 1인분의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을 대해야지. 적어도 그것부터라도


155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야’라는 선민의식 비슷한 게 내 안에 있었다. 그게 얼마 안 되는 내 안의 자부심의 근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순간 나의 자부심이 깨지는 것은 한순간이었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부심, 자긍심을 지켜내는 것은 생명을 지키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의 근원은 무엇이었고, 앞으로의 생에서 그 부여받은 근원 또는 자부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156

누가 더 나쁠까? 악의는 없지만 나쁜 말만 하는 사람 vs 악의는 있지만 차마 말로 뱉지는 않고 풍기는 사람


157

공포의 실체는 사실 비객관적으로 이성을 잃은 나 자신.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가난함’ 보다 ‘가난해질 것 같은 스스로만 느끼는 느낌’ 그리고 체감 안 되는 통장 속 작고 적은 수의 숫자들


158

서로가 잘 몰랐을 뿐. 게다가 ‘모른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이해로 나아가기 위해선 그 ‘모른다’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 인정하고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159

그런데 가끔은… 모른다는 그 사실 자체가 상처가 되기도 한다. 말 안 해도 아는 사이.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어쩌면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의 그림자에 가려져 안 보이는 것을 직접 말해줘야 될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더 친절하고 자세히 설명해 줘야 아는 사이라는 것. 


160

“난 혐오하지 않아”라고 말하고 이어서 그“런데 말이야…”라 말을 꺼내는 사람치고 혐오 발언 안 하는 사람을 못 봤다


161

‘암송’의 장단점은 명확하다. 좋은 말을 계속 되새기는 것은 마음의 좋은 토양이 되고, 나쁜 말을 되새기는 건 가스라이팅이 된다.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그 끝은 전혀 다를 수 있다


162

‘언젠간 할 수 있겠지’라는 말에 매일매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조금씩 해나가다 보면, ‘섣불리 아무것도 안 해보고 단정 지었던 지난날의 나’ 보다는 나은 내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163 

‘교육’과 ‘폭력’을 구분 못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도 싫다. 이런 생각도 폭력적인 걸까


164

아이와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를 읽다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마녀’는 ‘그레첼’에게만 일을 시키고 ‘헨젤’에게만 먹였을까(그 이유가 뭐든). 그리고 결국 상황을 해결하는 건 왜 ‘그레첼’이여만 했고(어떤 방식이든) 가족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걸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일까


165

오랜 시간 일기를 썼지만 그 내용은 대부분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었다. 그렇게 약 10년을 일기를 쓰고 또 이후 10년을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살았다. 그리고 다시 일기를 쓰려했을 때 두려움이 몰려왔다. ‘또 나를 질책하는 글을 쓰며 나를 괴롭히면 어쩌지’… 그래서 이번엔 방법을 바꿔 관찰 일기를 쓰기로 했다. 아이를 관찰하고 나를 관찰했다. 그리고 관찰한 내용만 건조하게 썼다. 그랬더니 나 자신에 한 걸을 물러서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나란 사람이 가지고 있고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 객관적으로 묘사 또는 서술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 감정도 관찰해서 적을 수 있게 됐다. 이제 내 일기장에는 자책만 있지 않고 여러 감정들이 섞여 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일기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처음 일기를 썼던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면 너무 암울해서 보기도 싫었던 그 시작이라도 시작을 해야 좋은 점, 나쁜 점을 알 수 있고 나아가기도 물러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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