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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민 Feb 16. 2022

그때는 몰랐었네. 내 방의 소중함을

“그런데 책은 어디서 사세요?" 후배가 물었다. "모름지기 출판인이라면  *사 아니겠어?" "음, 그런데 왜 *사에서 책이 오면 깨끗한 게 안 올까요?" "맞아 맞아"


이 대화에서 나는 홀로 댕~하는 순간을 느꼈다. 물론 용돈의 거의 대부분을 책사는데 탕진하다시피해서 *서점의 플래티넘 회원인 나이지만 앞선 질문과 같은 의문을 품은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전자책 찬양자이기도 하고 실제로 종이책을 사는 경우가 매우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우선, 전자책의 장점을 말하자면 가변성. 맘에 안 드는 디자인도 내 맘대로 바꿀 수 있다. 빠르게 읽을 수 있다. 책장을 옮겨 온 것처럼 원하는 책을 그때그때 찾을 수 있다. 밑줄친 문장을 찾아갈 수도 메모를 할 수도 있고, 사진 파일 같은 경우는 데이터의 손실 및 왜곡 없이 실제에 가까운 파일을 볼 수 있다, 가격도 훨씬 저렴하다(종이책 2권 살 돈으로 전자책은 3~4권도 살 수 있다), 여러 종류의 리더기를 설정할 수 있어 핸드폰에서도 태블릿PC에서도 이북리더기에서도 같은 설정으로 볼 수 있다(책을 상황에 맞춰 볼 수 있다), 배송을 안 기다려도 된다 등등… 장점은 수도 없이 많지만 단점은 오로지 하나 물성을 느낄 수 없다.


‘책의 핵심은 본문이야!’라고 늘 외치고 다니는 ‘나’인데, 현실의 ‘나’는 실물 종이책 한 권 갖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돼 버렸다. 회사에 개인 책장이 있지만 대부분 샘플 도서이고, 원하는 만큼 책을 갖고 있을 수도 없다.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은 모두 전자책 리더기 안에 있다. 읽고 싶은 신간이 나와도 일부러 전자책 버전을 기다리기도 하고, 언제 전자책이 나오는지 알림까지 걸어 놓는 나인데, 그동안은 아무 불만도 없었던 나인데, 왠지 혼자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우연히 초대받은 한 지인의 책장을 보고 더 심해졌다. 마치 내 전자책 책장의 실물판을 본 듯한 느낌. 파일로만 보던 책들이 옹기종기 비정형적인 모습으로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규칙 없는 규칙적인 모습에서 나는 영롱함을 느꼈다. 아, 취한다 취해. 이렇게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책장이라니. 언제든지 꺼내보고 냄새맡고 무게감을 느껴보며 손에 들 수 있다니.


‘그래, 나는 방이 없지. 책상도 없지. 책장도 없구나’

그동안 ‘전자책 최고!’,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외쳤지만 사실 없으니까 한 말이었구나.

그때는 몰랐었지. 내 방의 귀함을. 한 면 가득 책장이 있고 그 옆에 책상이 있고, 앉아서 컴퓨터도 하고 책도 읽고 필사도 하던 그때. 그때는 몰랐었지. 내 방이 사라질 줄. 좁아터진다 터진다 했지만 그곳이 진정 ‘나’의 ‘핫플’이고 ‘안식처’인 것을 그때는 몰랐지.




덧.

그런 의미에서 종이책 한 권을 샀다. 데이비드 호크니 옹과 그의 친구 마틴 게이퍼드의 대화를 담은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 호크니 옹의 (아이패드로 그린) 그림을 데이터 유실 없이 전자책으로 보고 싶었지만, 역시나 그의 다른 책들처럼 이 책도 (현재까지는) 전자책이 나오지 않았다. 나의 사랑 *사에서 구입했고, 역시 배송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봐줄만 한 정도였다(책 창고에서 며칠 일해보니 책 교환에 다소 관대해졌다). 종이는 무엇을 썼는지 280페이지임에도 23mm이 조금 넘을 정도로 두껍다(미색 모조 100g을 써도 280페이지면 16mm 밖에 안나오는데). 그래서인지 종이 뒷비침도 거의 없어서(그림 위에 글자가 비치지 않아서) 그림을 보기 아주 좋다. 따뜻한 봄처럼 본문 종이의 백색도(白色度, 표면색의 흰 정도를 1차원적으로 나타낸 수치. 한마디로 흰색의 정도)도 엄청난 미색이다. 원서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미색에 호크니 옹의 그림을 썼다는 것도 너무 놀랍다(미색 종이를 쓴다는 것은 그림에 노란색을 어느 정도 갖고 간다는 뜻도 된다. 고로 원본이 훼손될 수도 있는데. 그런데도 썼다는 것은 의도일까. 아니면 그 노란색마저 반영된 그림일까).

그런데 이 책을 어디서 읽을 수 있을까. 집에는 내 방은 없고, 회사 책상엔 일거리가 쌓여 있다. 그렇다면 오늘도 오가는 퇴근길 지하철 한켠을 내 방 삼아 읽는 수밖에. 그래도 오늘만큼은 종이를 사각사각 넘기면서, 나도 같이 사각사각 문장을 한 입씩 베어물고 싶다.



덧2.

*사는 실제로 파본은 아니지만 파본인 듯한 책들이 자주 배송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나도 가끔씩 파본을 받아보는 경우가 있는데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기념(?)으로 사진 몇 장 찍어놓는다던지 정도는 하고그냥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사는 이런 파본이 와서 교환을 해도 딱히 개선된 상품이 오지 않는 경우도 있어 몇 번을 교환하기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에 반해 **사에서 교환 신청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교환 따위 받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꼼꼼 포장으로 나를 감동시킨 적이 있다. 각 서점별로도 배송의 스타일이 있다니 이또한 재밌는 일 아닌가.



덧3.

그래도 난 전자책을 사랑한다! 이는 변하지 않는 진리와도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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