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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민 Sep 12. 2023

‘먹고사니즘’을 넘은 가르침

‘학원’이란 곳은 참 그렇다. 무엇보다도 실적이 중요하고, ‘입시’라는 명확하고 선명한 실적 앞에 다른 것이 끼어들 틈은 없다. 보통은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게 당연한 곳이다. 하지만 내가 만난 그중 몇몇은 좀 달랐다. 입시 분위기가 지금과 달라서 그런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시대와 상관없이 그들이 유난히 달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걸 그 시절 ‘한시적 로망’이라고 치부하기엔 그들은 그 ‘로망’이란 걸 품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에겐 특유의 아우라가 있었는데 그 아우라라는 것이 너무 현실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마치 그들 존재처럼. 그런 오묘함을 가진 어른들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났을 때의 ‘나’는 과연 저런 오묘한 아우라를 풍기는 어른이 될 것인가, 그냥 ‘사는’ 어른이 될 것인가 궁금하기도 했었다.


2001년의 여름은 나에겐 참 중요한 시기였다.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절대다수였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5~6년에 걸쳐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어차피 선행학습을 했더라도 공부 잘하는 애, 못하는 애가 어느 정도는 나눠져 있었기 때문에 서로 간 넘을 수 없는 벽 또는 등급의 수준이란 게 있었기 때문이다. 큰 그림은 이미 그려져 있고 각 등급 안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점수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였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기적이 일어날 만큼 열심히 하지도, 의지도 없었지만 나중에 후회하긴 싫어서 조금은 노력 비슷한 거도 해보고 싶었던 딱 그만큼의 시기. 때마침 야무지고 공부 잘하는 친구도 옆에 있었기에 친구 따라 가성비 좋은 단과 모음 수업을 등록했다. 다른 수업은 어찌어찌해 본다지만 수포자이자 과포자인 내게 다른 네 종류의 과학 수업(지구과학, 물리, 화학, 생물)을 듣는다는 건 매 순간이 도전 아닌 도전이었다. 그나마 물리는 일상생활이랑 연결시켜 생각하고, 생물은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게 있었고, 지구과학은 어릴 때 본 만화 지식을 총동원해서 어떻게든 해본다지만 화학은 답이 없었다. 일단 외우고 시작해야 되는 게 많았고(현실적으로 실험을 한다거나 그런 건 불가능했기에) 그 화학물 간의 시너지 및 화학작용도 공식처럼 외울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도 안 외웠는데 갑자기 번개처럼 외워질 리가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 앞에 그렇게 좌절하고 있을 때였다.


수업 첫날, 이 화학 선생님이 나눠 준 책은 좀 특이했다. 일단 앞표지는 일반 화학책이었지만 뒷부분이 달랐다. 뒤표지엔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나 나올 법한 왠 오지 사진이 있었고, 책의 부록에는 더 다양한 세계 각국의 오지 사진과 한 홈페이지 주소가 쓰여 있었다.

정식 수업에 들어가기 전 선생님이 자기소개를 먼저 시작했다. 


“나는 화학을 가르치는 화학 선생이지만 직업이 한 개 더 있어. 

나는 사진작가야. 이렇게 너희들을 학원에서 가르치다가 돈이 모이면(?) 외국으로 가서 한 동안 사진을 찍지.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한국으로 와서 너희 같은 학생들을 가르쳐. 그렇다고 내가 대충 가르치진 않아.

재밌게 가르칠 거야. 너희들에게 화학의 재미를 알려줘야지. 화학이란 게 무조건 외워야 되는 것도 있지만 외우는 것도 재밌게 외우는 방법이 있어.


그리고 저기 뒤에 있는 홈페이지 주소 보이지? 거기로 들어가면 내가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어.

공부하다가 힘들거나 심심할 때 한 번씩 들어가서 봐봐. 재밌어”


내가 너희들을 가르치는 건 ‘화학’ 마냥 좋아서도 아니고 내 생업과 작가 생활을 하기 위해서이지만, 그렇다고 대충 가르치진 않는다! 난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돈을 모아) 떠날 것이다! 아마 너희가 대학 갈 때쯤


이란 선언은 그전에도 그 후에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기 욕망 앞에 솔직하고 진솔한 선언 앞에 아이들은 어벙벙해졌다. 그때까지 어른들을 보면 얻은 직업에 대한 정의는 1. 생계, 2. 생계 3. 생계!!! 거기에 즐거움이 끼어들 틈은 없었는데 이 선생님은 뭔가 다른 역할 모델을 보여줬다. 게다가 과한 금액 책정도 하지 않아 나 같은 서민 학생도 충분히 들을 수 있게 했다. 그 덕분인지 비록 화. 알. 못이지만 예전에는 두 개 틀릴 문제였다면 한번 더 보게 되어 한 개는 덜 틀릴 정도로 성적은 향상됐다. 대세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본래 얻고자 한 목적은 어느 정도 이룬 셈이 된 것이다. 


실제로 쉬는 시간이 되면 그 부록 속 사진을 보기도 했었다. 사진 속에서 오지의 사람들과 환희 웃고 있는 선생님과 내 눈앞에 있는 선생님. 괴리감이 들법했지만 그저 오묘하다고밖에.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의 한계, 자기 욕망의 부딪힘에서도 무엇하나 놓치지 않고 균형을 잡는 어른을 본 게 처음이기도 해서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 학원엔 이상한 기운이 있었는지 또 오묘한(?) 선생님이 한 명 더 있었다.


국어/언어 선생님이지만 언어는 안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었다. 문제 풀이보다는 접근법을 많이 이야기 한 선생님이다.


“너희들이 이 시를 어떻게 읽느냐. 이런 건 사실 자유지. 어떻게 읽어야 되는 건 없어. 하지만 지금은 시험을 봐야 하니까.

문제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 보는 거지. 앞서 이런 이런 유형의 문제가 나왔다면 이 문제에선 이런 답을 원할 거야. 그런 식으로 전체 문제를 풀어가는 거야”


하루는 이런 말도 했다.


“내 수업이 반은 문제 풀이지만, 반은 토론이야. 왜 국어 시간에 토론을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이런 일이 있었어.

너희들 ㄱㅈㅇ이라고 들어봤어? 거기서 어느 동네에 인기 국어 강사가 하란 국어 수업은 안 하고 애들이랑 토론한다고 제보가 들어왔대. 그러면서 나랑 얘기 좀 하자고 찾아온 거야,

내 출신을 물어보더라고. 나보고 어디 출신이냐고 물어보길래 K상도라고. 그럼 학교는? S대. 그럼 K지역 출신에 S대까지 나와서 강의하면서 애들이랑 왜 수업 안 하고 토론하고 쓸데없는 소리 하냐는 거야.

그래서 말했지. 국어는 생각을 틔워줘야 한다고.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정해진 답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그다음에 문학을 읽으면 다르다고 말이야.

그리고 애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애들 마음이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말하고 말았지. 하하하… (중략)…

그래서인지 대학생이 돼서도 내 수업 들으러 오는 애들도 많아. 그냥 토론이 하고 싶다나. 하하하”


모 드라마에서 열심히 초능력자 따라다니는 줄 알았던 ㄱㅈㅇ 직원이 동네 학원 강사까지 다닌다는 게 진짜인지 아니면 선생님의 상상력의 산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래도 저래도 좋았다. 지금은 내 뜻대로 문학을 못 읽어도 나중에 마음껏 읽을 수 있게 의구심을 가지고 상상력을 가지라는 선생님의  응원 같은 말이 당장 1년 뒤에 내 미래를 설레면서 기다리게 했으니까.


그 후로 1년이 지나 2002년이 되고, 2005년이 되고, 2010년이 되고, 2023년까지 시간이 지났다. 오묘할 줄로만 알았던 인생은 쓰고 달고 맵고 행복하면서도 이상했고 기묘했다. 알 수 없었고 내가 알고 있던 어른들과 조금 달라 보였던 어른들도 사실 아주 평범하고 평범한 어른들이었으며 진부하게도 자식 같은 아이들이 초롱초롱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때 무슨 말이라고 해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에게 물어볼 수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 있냐고. 오묘한 어른인지 평범한 어른인지 꼰대 같은 어른인지.



   * 이 화학 선생님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너무 궁금하기도 하고 희미하게 얼굴만 기억이 날 뿐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 아쉽다는 얘길 친구에게 한 적이 있었다. 때마침 '검색엔진 인간'이었던 이 친구는 20년 동안 못 찾았던 내가 말한 이 부정확한 몇몇 키워드만 가지고 이 선생님의 이름과 블로그를 하루 만에 찾아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그 이후로도 여전히 스타강사의 삶을 살면서 작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하셨다고 한다. 그 시절의 홈페이지는 없어졌지만 블로그가 생겼고 거기에서 그 시절 내가 봤던 사진들도 다시 볼 수 있었다. 너무 오묘해서 내 기억이 현실이었던가 싶었을 때도 있었는데, 내 기억이 추억이 현실 속에서 뿌리내린 것에 기반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 기쁘기도 했다. 이제 국어 선생님만 찾으면 되는데, 이번에도 얼굴만 기억이 난다. 또 검색엔진 인간 친구에게 부탁을 해야 하나. 나는 또 선생님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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