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친할머니를 떠올리면 전형적일 만큼 할머니 자체의 모습이 있다. 약간의 색이 들어간, 얼굴보다도 훨씬 큰 뿔테 안경에 짧은 파마머리, 거기에 엄청났던 사투리 억양.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내게는 찐 경상도 할머니, 그리고 낯섦 그 자체였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 밖을 나간 경험이 거의 없는 나에게 할머니의 그 억양은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비록 부모님이 모두 경상도 출신이었고, 할머니조차 30대 이후에는 서울에서 보내신 분이라 할지라도 부모님의 억양과는 또 달랐다. 할머니의 억양은 진정 어나더 레벨. 도저히 가까이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를 떠올리면 대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늘 화가 나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이런 얘기를 사십 년 만에 엄마에게 털어놓으니 깜짝 놀라며 할머니만큼 다정한 분이 없다고 참 좋은 사람이셨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다시 할머니의 행동을 곱씹어 보니 확실히 그런 부분이 있었다. 억센 말투와 억양 뒤에 그렇지 못한 스위트함을 말 뒤에 감추고 계셨을 뿐 할머니처럼 샤이(shy)하신 분도 없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늘 우리 집에 들어오실 때마다 버릇처럼 “아,↗ 이 집↘ 사↗람↗들↘은 와! 이리↘ 말이 없니↗”라며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스스로 너스레를 떨면서 들어오셨다. 그리고 “니! 말 쫌! 해 봐라↗!!!”라고 자신을 어색해하는 손녀에게 먼저 손을 내미셨다.
그런 할머니와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런 일은 절대 없었는데 어쩌다 이유도 기억이 안 나지만 추석 명절에 그것도 단 둘이 있어야 할 때가 있었다. 숨 막힐 듯한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눈앞의 귤을 까며 티브이를 틀었다. 케이블 티브이도 변변치 않던 시절, 티브이에선 명절 특선 드라마 <다모> 전편을 방영하고 있었다. 말없이 티브이만 어색하게 보다가 드라마계의 레전드 장면인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냐” 씬이 나왔다.
“경민아” “네”
“사랑이 뭐꼬?” “네????.?”
“사랑이 몬데 저렇게 절절하게 사랑한다고 해쌌는기가. 내는 모르겠던데. 니는 아나?”
“……(저는 지금 청소년인데요)”
그때 인생의 가르침 비슷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할머니가 팔십 평생을 살아도 모르는 그 사랑이란 거. 저도 나이 먹으면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사셔도 모르실 수 있죠. 그거 원래 모르는 건가요…
할머니가 드라마 속과 같은 사랑을 알았는지 어쨌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사랑의 정의를 내리라면 그것도 쉬이 대답할 수 없다. 그게 무엇이든 한 가지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듯이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 ‘사랑이 모꼬’라는 말과 함께 그날의 따뜻하고 오묘했던 기억이 떠오르고, 이 또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사랑에 대한 정의’ 중 하나는 ‘할머니’ 그 자체라고.
*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계속 입버릇처럼 '감사하다'는 말을 달고 사셨다. 이것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화가 났다. "할머니! 도대체 뭐가 감사해요? 할머니한테 못되게 군 사람들 이자까지 쳐서 사과받아야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늘 감사하다면서 원수같이 지냈던 어떤 사람에게도 "내가 이 세상 떠나면 내 장례식에 와 줘. 네가 와주면 참 좋을 것 같다"라며 화해를 하고 가셨고 실제로 그분도 할머니의 장례식에 오셔서 할머니를 배웅해 주셨다. 생에 마지막에 그렇게 손을 내민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용기를 내야 할 때를 정확히 알았고 일말의 주저함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할머니가 누군가와 자신의 인생을 끊임없이 비교했다면 그렇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표현할 수도, 화해를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고, 설령 비교했더라도 괘념치 않고 스스로의 인생에서 '그래, 아쉽지만 잘 살았다. 그래도 행복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기에 그렇게 감사하다고 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인생의 끝자락에서 감사함과 행복함을 느낀 할머니, 참 잘 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