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민 Mar 28. 2022

추우면 발등이 시려오는 나조차도

작년의 어느 날 일이다. 아이, 남편과 함께 8차선 횡단보도를 걷다 스스로 스텝이 꼬여 쿵 소리와 함께 큰 대자로

뻗으며 넘어졌다. 당시에는 망신스럽다는 생각보다 유모차 안에서 그 과정을 다 봤을 아이가 걱정돼 얼른 일어나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이후로 비가 오거나 기온이 조금만 떨어져도 발등이 아프다. 아파 죽겠네~까진 아니어도 하루 종일 신경을 거슬릴 정도는 돼서 결국 병원을 찾아갔더니, 병원에선 이렇게 말했다. “엑스레이에는 안 찍히는 아주 가느다란 실금이 있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치료를 할 수는 없습니다. 진통제 처방해 드릴게요. 일단 드셔 보세요” 한마디로 치료 불가. 분명 내 몸을 불편하게 하고 이렇게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통보받았다.

그 이후로도 눈이 오니 비가 오거나 아니면 그것들이 오기 전에 수분 가득한 날에는 늘 발등이 시렸다. 그런데 이건 정말 아픈 게 아닐 수도 있다. 내가 가진 것이기에 그리 신경이 곤두선 것일 뿐, 의사의 말대로 눈에도 엑스레이조차도 찍히지 않은 작은 실금. 그것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분명 불편하다. 내 것이 되었지만 익숙하지 않고 변화하는 날씨에도 신경이 쓰이며 분명 불편한데 아무 치료도 못한다는 의사의 말도 화가 난다.


요즘 아침 출근길이나 퇴근길이 되면 지하철에서 많은 방송을 한다. ‘지금 어디 어디서 시위를 하니 길이 막히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떤 이는 이것이 불편할 것이다. 사실 나도 불편하다. 퇴근길 한가운데서 열차가 멈춰있는 순간, 엄마의 퇴근만 기다리며, 만났을 때 “엄마~ 얼마나 걱정했는데~”라고 말할 아이를 생각하면 진땀이 흐른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나의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는 이 작은 고통이 나를 이렇게 화나게 하는데, 누군가는 이것이 삶이고 하루 일과라면. 한국 정도의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라면 누구나 공부하고 싶을 때 하고, 직업을 가질 수 있으며, 적어도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자유롭게 이동해야 된다. 그 수단이 무엇이든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열려있어야 한다. 그건 나라에서 백성에게 베푸는 게 아닌, 세금 받고 일하는 국가라면 당연히 세금을 내는 국민에게 제공해야 할 의무이다. 그들의 말하는 방식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 해서, 시민을 볼모로 삼았다느니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야 말로 정말 맞지 않다. 그들이 길에 나와 다른 시민들의 출퇴근길을 막기 전에는 제대로 듣지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은 것 아닌가. 그들도 이미 시민들의 불편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끝까지 안 들리는 척하는 그분들에게 가서 귀에 때려 박는 방법을 택한 것뿐이다. 안 듣는 사람에게 말하려면 그들이 들을 수밖에 없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응원을 보내며, 오늘도 조금 일찍 출근한다. 시위 때문에 지각했다는 말은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기에. 그들의 말을 ‘시위’라 단순 폄하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들의 절절한 목소리에 응원하고 힘을 싣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