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민 Oct 03. 2022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들이라니

40살, 감사합니다. 나의 감정 뱀파이어님

얼마 전 티브이를 보다 한 장면에 눈길이 갔다. 화면 속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 호박씨 수집 중이야(하하하)“

내 뒷말하는 것 알고 있고 그 정도는 괜찮아라는 의사의 표현 같았다. 대범하게 말할 수 있는 그 유쾌함에 한 수 배웠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얼마 전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앞담화인지 뒷담화인지 모를 이야기를 들었고 사실 조금 화가 났지만 일견 맞는 말도 있기에 나를 위한 조언의 하나로 삼기로 했다. 그래도 한 번씩 화가 끓어오르는 것도 있었는데 그게 최소한의 사실관계와 책임 여부를 가리고 해줬으면 하는 호박씨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의 상태는 ai는 기가 막히게 알아서 알고리즘으로 엄청난 영상들을 추천해주기도 했는데, 그러다 발견한 것이 ‘감정 뱀파이어’ 영상이었다.


흔히 ‘감정 뱀파이어’라 불리는 유형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감정을 쪽쪽 빨아먹으니 얼른 손절하라는 게 강의의 요지였다. 그럼 손절은 어떻게 하느냐. 여러 방법이 있었지만 너무 멋진 것 중에 하나. 그냥 전화번호를 지우세요. 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전화번호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많은 사람이 말했지만 전화번호를 지우는 건 너무 색다르게 다가왔다. 전화번호를 보관해 두면 괜히 전화 올까 봐 신경도 쓰이고 sns에 자동 추천으로 뜨기 때문에 알고 싫어도 알게 되는 정보들이 있다. 그럼 저장명을 좀 밉게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질문에. 노놉. 그냥 지우세요. 그리고 전화가 오면 말하세요. “누구세요”라고.


띵. 머릿속을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들을 살펴봤다. 이 중에 전화를 한 번이라도 한 사람이 있던가. 그리고 매일 보는 사람이라도 전화나 메시지를 보냈던가. 아니었다. 어차피 연락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빠르게 연락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매일 연락하는 사람, 1달에 한 번이라도 연락하는 친구, 그리고 보고 싶은 친구의 번호는 놔두고 모두 지웠다. 그러고 나서 전화번호를 쫙 한 번 훑어봤다.


남은 이름들은 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 그들의 이름만 봐도 힘이 나고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해도 인생이 짧다는 것을 그때 어렴풋이 그러나 피부로 느꼈다.


이 사람들에게 잘해야지. 그리고 사랑하고 살아야지. 감사합니다. 감정 뱀파이어님. 덕분에 한 수 배웠습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죠. 안녕히 계세요. 저는 이만 손절갑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