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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민 Feb 03. 2022

마흔이 돼서야 알게된 것들, 마흔이 돼도 모르겠는 것들

나이의 숫자는 지구와 나의 교집합의 어느 시기일뿐, 진짜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잇값 못한다. 나잇값 한다라는 말은 어느면에서는 맞고 어느면에서는 틀린 말인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이 진짜 몇 살인지 인생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기에.


그런데 꿈에도 안 올 것 같은 마흔 살이 되어 보니 자꾸만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미혹(迷惑)하는 건 물론이고, 자꾸만 스톱(stop)을 외치게 되는… 돌이켜보면 없었으면 좋았을 일들도, 있어서 별로였던 대부분의 기억이 이제는 화석처럼 남아 나의 일부가 되었다.


마흔이 된 것 뿐인데, ‘그때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라는 생각은 이제 하지 않는다. 스스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딱히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냥 그런 생각에 다다랗다. 이 한계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도, 게다가 그걸 뛰어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것. 일평생(一平生) 가능한 것이긴할까. 그런 한계가 있다는 것 조차 인지할 수 있을까.


요즘은 그런 생각도 한다. 나에게 많은 상처를 줬던 내 곁에 있던 사람들-가스라이팅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를 사랑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했지만 그 말뜻은 ‘사랑한다’였다. 사랑하는 마음에는 한계가 없었지만 표현하는 방식에는 자기 한계가 분명했다.


나잇값을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말을 곧이 곧대로 이해하지 않기로 한 것. 그 사람의 한계를 감안해 듣는 것. 상처주는 어떤 이의 그 말. 그 안의 속뜻은 사실 ‘사랑하지만 이렇게밖에 표현 못해’라는 다른 표현이란 것. 그 뜻만은 곡해해 듣지 않기로 한 것. 그리고 ‘나’는 꼬아서 말하지 않기로. 좋은 것은 좋다고 사랑하는 것은 제대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이것이 마흔이 된 내가 알게 된 것이라면 알게된 것이지만 앞으로 어떤 것을 더 알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모르고 있을까. 얼마나 철부지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한계를 쌓아왔을까. 내 남은 인생에서 이 한계를 얼만큼 부수고 또 상처주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 모르는 것 천지지만 다시 한번 되새긴다.



남의 한계에 관대해지자.

남의 뜻을 곡해해 듣지말자.

남의 인생에 마치 지분 있는 것처럼 함부로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자.

내 감정과 생각을 꼬지 말고 오해없이 제대로 전달하자.

그리고 나에게도 조금은 관대해지자(나한테만 관대하지도 말고)



각자의 사정, 각자의 인생이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코로나라는 변수를 만난 지금. 최선을 다했어도 그렇지 않게 평가될 수도 있다. 그래서 허무할 수도 있는 마음에 소금치치 말고 안아주자. 대신 입은 다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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