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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통성 있게 행동하기] 못하는 사람

by 김경민

내 인생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실수’. ‘실수의 연속’도 아니고 그저 실수. 요즘말로 ‘그’ ‘잡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실수란 단어에 정의를 좀 더 추가한다면, ‘아주 극적이고 치명적이진 않지만, 헛웃음이 나는 게 어이없고 황당함’ 정도가 되겠다.


어려서 나는 이상할 정도로 어리숙했다. 어린애가 어리숙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어릴 때만 그렇지 않았고 꾸준히 그 어리숙함을 유지하는 중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이유도 없이 열이 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이’는 아무 이유가 없이 열이 난다(딱히 우리 아이만 그런 것도 아니고). 그것도 자주.

하지만 시대는 코로나 시대의 한가운데에 있는 초보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저 발만 동동. 아무래도 묘안이 생각나지 않았던 나는 책 한 권을 꺼냈다(?).


전국의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무조건 한 권씩은 그 책! 법전 저리 가라 하는 큰 크기와 두께로 압도하지만 노란색 표지로 ‘어렵지 않아요~’라고 유혹하는 그 책! 그래서 없는 집은 없지만 읽은 집은 거의 없는 그 책! 그 책을 꺼내 들었다. 사전과도 같은 그 책을 한 장씩 넘기며 우리 아이와 같은 증상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그 뒤로 들려오는 남편의 싸늘한 목소리.


“뭐 하니?”


“응? 증상 찾아보고 있는데??”


아이는 펄펄 열이 끓어 뒤집어지고 있는데 태연하게 책을 뒤지는 나를 보고 천불이 나지만 어이가 없어 차가운 말을 내뱉은 남편이 거기 있었다. 사실 나라고 태연하게 책을 뒤진 건 아니었다. 너무 당황스러워 인터넷으로 찾아볼 생각조차도 못하고, ‘아, 국민 해법!’ 하고 책을 뒤진 것뿐이었다.


나의 융통성 없음은 당황스러울 때, 예를 들면 아이가 아플 때 더 발휘되는데, 아이와 함께 병원에 갔다가 다른 진료에 방해가 될 정도로 우왕좌왕해서 간호사가 직접 진료실 문 앞까지 데려다줄 정도였다. 그런데 하필 그것을 뒤에서 아이와 함께 지켜보고 있던 ‘나의 엄마’란 사람이 있었다. 그때의 엄마의 표정은… ‘쟤는 나이를 먹어도…’ 정도랄까.


그 외에도 택배 주소 이사 전 주소로 써서 찾으러 가기, 배달 주소 잘 못 쓰기, 공식 서류에 영문 이름 오타 내기, 책 표지에 저자 이름 빼고 인쇄하기, 브런치 글 제목에 오타내서 다시 수정해서 올리기, 예약 날짜 잘못 보고 엉뚱한 날에 가기, 아무렇지 않게 스포일러 하기, 남의 말 못 알아들어서 계속 물어보기, 타이머 시간 30분을 300분으로 맞추기 등


일상 그 어디에서든 실수를 하는 건 내겐 너무 당연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의도치 않았어도 실수를 반복하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마련이다. 피해를 준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다가 어느새 느낌이 싸해 돌아보면 주변을 실수 투성이 가시밭길을 만들어놨다는 것, 오로지 혼자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자책한 것도 여러 번이다.


그런 내가 택한 한 가지 방법은(사실 다른 방법도 없었다) 천천히 복기하면서 하기. 멈춰 보고, 돌아보고 다시 보고 물어보기. 덕분에 실수도 많았고 여전히 부산했지만 실수를 조금씩, 아주 아주 조금씩 줄일 수 있었다.


그 덕에 누가 실수를 하면 도와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아, 그거. 나도 그거 실수해 봤는데~ 이렇게 하면 실수 안 해 ㅋㅋㅋ”


물론 지금도 방심하면 안 된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 실수할 수 있다. 1일 1 실수는 기본이기에. 다만 실수다반사 인간이기에 다른 이에게 여유를 가질 수… 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또 그렇지도 않다.


스스로 이제는 융통성 있게 실수하는 타인을 이해하고 있어~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실수하는 인간을 도끼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간사하고 자기중심적이고 과거도 미래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도 융통성은 여전히 없다.




잘한 일:

영유아기의 아이 사람이 하나 있는 집이라면 그곳은 ‘집’이라는 단어보다는 ‘집구석’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물론 아이와 어른이 공간이 정확히 나눠져 있는 대궐 같은 집이면 모르겠으나 네 방 내 방 할 것 없는 공간이라면 서로의 영역을 나누기 어려워지고 집은 서서히 그리고 온전히 그 영유아 사람의 것이 된다.

이럴 때 발휘해야 되는 게 부모 사람의 파트너십이다. 나는 이제까지 그런 게 별로 없었다. 서로 암묵적으로 나뉜 업무가 있었지만, 사실은 그 너머를 보고 싶어도 잘 안 보였다. 일단 내게 맡겨진 혹은 맡은 일을 해내기에도 벅찼다. 그래서 또! 의도치 않게 상대방의 업무를 망치는 일들을 종종 해왔다. 정리라는 ‘의도’였지만.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정의된 ‘정리’를 실현하느라 바빴던 게 사실이다. 어젠가는 나의 ‘정리’를 멈추고 남편의 시선에서 부족한 부분을 먼저 ‘정리’했다. 남편의 기준으로.


“오! 이제 손발이 맞는 것 같은데!”


15년을 함께 했는데 이제 손발이 맞는 느낌이 조금 든다니… 백세 인생인 이제라도 맞는 게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우리 앞으로도 하나씩 맞춰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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