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가장 평범한 가족을 꿈꾸며(1)

_ 내 가족은 내가 스스로 만든다.

by 행복한 거복이

2015년 10월, 2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며 드디어 아버지에게서 벗어났다. 4살 차이는 궁합도 보지 않는다는 옛말을 철석같이 믿고 4살 많은 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 사람은 대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났다. 장학금을 받고 전문대에 입학을 했지만 아버지는 전공책을 살 용돈조차도 주지 않았고 학교 수영장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처음 이력서라는 걸 썼다. 이력서에 쓸 내용이라곤 학교 입학과 졸업밖에 없어서 맨 마지막 빈칸에 "뽑아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이력서 마직막줄을 채워 냈다. 나중에 아르바이트 합격연락을 받았을 때 학교 측에서 맨 마지막줄이 인상 깊어서 뽑아주셨다고 하여 내심 뿌듯했다. 전공수업을 마치면 친구들은 호프집으로 갔지만 나는 성실하게 수영장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접수대에서 새로운 회원을 등록하기도 하고 남/여 탈의실 열쇠를 챙겨주고 수영수업이 끝나고 수영장 문을 닫으면 아르바이트가 끝이 난다. 대학교내에 있는 수영장이다 보니 지역주민들과 인근 공군에 협약도 되어 있어서 군인들이 많이 왔다. 대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니 공군아저씨(?)들이 자주 말도 걸어주고 마치면 밥도 사주곤 했다. 마감 아르바이트였기 때문에 집으로 가는 길에 차를 태워주겠다는 공군아저씨들도 있었는데 세상이 무서우니 거절을 종종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주민으로 등록한 선해 보이는 인상에 까불거리는 오빠가 자꾸만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저녁도 사주고 집에 바래다주고 했다. 저녁을 자주 얻어먹게 되었는데 사실 이때는 밥 사주는 오빠가 제일 좋았던 것 같다. 성실히 수영장에 와서 운동을 하고 수영장 문을 닫고 있으면 달달거리는 스포티지를 끌고 와서 집까지 태워주는 그 오빠가 참 고마웠고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상담사로 취직을 했다. 그 회사에는 여자직원이 99% 였기 때문에 텃세도 심했고 휴가를 다녀오면 코수술을 하고 코에 붕대를 감고 오는 직원들이 많았다. 남자친구가 회사로 꽃과 케이크를 보내주는 이벤트를 해주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다른 직원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오빠도 그랬다. 회사에 늦을 때면 차로 바래다줄 때도 있었고 생일이 되면 회사로 꽃과 케이크를 보냈다(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부럽다고 말해서 보내준 것 같기도 하다). 명품백을 자랑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나는 그 시절 명품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루이비통이 그렇게 비싼 가방인 줄 처음 알았다. 상담사로 2년을 근무하면서 나는 1년에 천만 원씩 저축을 했다. 2천만을 모아서 전세금이 부족하다는 아버지께 챙겨드렸다. 그리고 상담사로 입사를 할 때 뭣도 모르고 은행직원분의 권유로 펀드를 하나 가입했었는데 그게 수익률이 좋아서 천만 원이 되어 있었다. 결혼을 할 때 당연히 집에서는 1원 한 푼도 보태주지 않았고 사실 기대도 안 했다. 천만 원으로는 결혼을 할 수가 없었기에 국민은행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5백만 원을 대출받았다. 24살, 천오백만 원으로 가장 평범함 가족을 꿈꾸며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외동아들이다. 시부모님은 나를 딸처럼 예뻐해 주셨고 나도 새로운 부모님이 생겼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버님, 어머님을 챙겨드렸다. 생신 때는 약밥으로 케이크도 만들어서 가고 퇴근하고 집에 오는 남편에게 맞벌이를 하고 있었지만 밥도 잘 차려냈다. 남편은 입이 짧았고 한번 먹은 반찬은 두 번 다신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그래도 3교대 근무하는 남편이 안쓰러워 최대한 현모양처가 되려고 노력을 했다. 결혼을 하고 1년 반이 지났을 때 첫째 딸을 낳았다. 나에게도 드디어 딸이 생겼다. 시아버지께서는 장남에 외동아들을 두셔서 손자를 바라셨지만 15개월 뒤에 태어난 둘째도 딸이었다. 나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손자를 낳아주지 못한 부분이 아직도 시부모님께는 죄송스럽다. 남편은 자유분방한 사람이었고 28살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30대 초반에 두 딸의 아빠가 되었다. 하지만 가족보다는 친구들과 집 밖을 더 좋아했다. 혼자서 독박육아를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빠, 엄마, 딸 2명 이렇게 4명의 가장 평범한 가족을 만든 것에 대해 나는 만족했다. 가끔 남편의 휴대폰에 강호동, 이만기 같은 연예인 친구들이 전화나 문자를 보낼 때에도 나는 "오빠 친구들은 연예인이름이랑 같은 사람들이 참 많네?" 라며 해맑게 얘기를 했으니 말이다. 아직도 후회가 되는 것은 처음 시부모님께 인사를 갔을 때 남편집에 방이 3개였는데 TV가 각 방에 1대씩 총 3대가 있었다. 24살의 나는 빨리 결혼을 해서 아버지 곁은 떠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고 TV가 3대이니 이 집에서는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었다. 대화가 없는 가족일 거라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이기적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오고 있는 가족일 거라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남편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꼭 해야만 했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갖지 않는 문제로 자주 다투었다. 10년을 다독이며 이쁜 딸과 토끼 같은... 아니 곰 같은 마누라를 보며 함께 행복을 찾아보자고 애원했지만 결국 남편과는 헤어졌다. 34살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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