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으라는 거냐? 웃으라는 거냐?
이번 편은 율군의 입장에서 쓰였습니다.
큰일 났다. 콩알만 한 내 여자 친구 때문에 요즘 몹시 곤란하다.
며칠 전 콩알이 호박, 파프리카, 참치, 햄, 계란, 감자, 김, 브로콜리... 등등 목적 불명의 아이템을 양손 가득 들고 내 자취방에 왔다. 그러더니 내게 선전 포고를 하는 것이었다.
“선배님, 자취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지요? 내가 밥 해줄게요.”
불안했다. 분명히 재료가 오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목적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저... 흠... 국주야. 뭐 만들게?”
“된장찌개요!”
아, 예상치도 못 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니 손에 든 재료는 죄다 전투 식량들인데, 저걸로 어떻게 된장찌개를 이루어낸다는 것인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 거 같은데......
“국주야... 된장은?”
“아! 맞다.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된장만 다시 사 올게요.”
어떻게 하면 된장찌개를 목표로 하면서 된장을 잊을 수가 있는 건지. 아니, 잠깐... 나가려던 콩알을 다시 붙잡고 물어봤다.
“국주야... 멸치랑 다시마는?”
“선배님, 된장찌개에 그런 게 왜 들어가요?”
그럼 넌 된장찌개에 뭘 넣을 건데?
“어… 흠… 그럼 브로콜리는 왜 사 왔어?”
“선배님! 브로콜리 엄청 맛있어요!”
허, 반드시 막아야 했다.
“국주야. 요리 안 해줘도 돼. 우리 치킨 시켜 먹자.”
“선배님. 괜찮아요.”
아니, 내가 안 괜찮아. 당장 멈춰.
그러거나 말거나 콩알은 부엌에 들어가더니 치열한 전투를 시작했다. 이리 튀고 저리 튀며 재료와의 사투를 벌이던 녀석은 결국 양 조절마저 실패했다.
누가 그랬던가.
나를 위해 요리하는 내 여자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큰 솥에 정체불명의 재료들을 잔뜩 넣고 주걱으로 휘젓고 있는 내 여자의 모습은 마치.... 마녀가 수프를 끓이며 주술을 외우는 모습과 흡사했다. 도대체 왜 멀쩡한 국자를 놔두고 주걱으로 젓고 있는 건지. 양 조절에 완벽하게 실패한 녀석은 그 정체불명의 음식을 집에 있는 모든 냄비에 나눠 담았고, 나더러 그중 하나를 먹으라고 명령했다.
하... 진정 저걸 먹어야 하는 것인가. 그래, 뱃속에 들어가면 다 같을 것이다. 어쨌든 재료는 신선한 걸 썼지 않은가. 그렇게 나는 녀석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앞에서, 마의 음식 한 그릇을 견뎌냈다.
녀석은 몹시 흡족한 마음으로 귀가를 했고, 녀석이 사라진 방에는 나와 악마의 수프... 단 둘만이 남았다. 젠장.
모든 냄비가 풀소유 상태라 다른 요리를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저거(?)때문에 냄비를 더 살 수는
없었다. 재료와 사투를 벌이던 녀석의 얼굴이 생각나서 저걸 그냥 버릴 수도 없었다.
냄비를 볼 때마다 콩알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렇게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태에서 며칠이 흘렀다. 그리고 영원할 것만 같던 악마의 수프도 결국에는 상하고 말았다.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텼다.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양심의 가책을 덜고, 저것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굳이 콩알을 속상하게 할 필요는 없으니, 녀석에게는 맛있게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콩알이 온다고 할 때마다 냄비에 다른 음식들을 채워놓았다. 넌 이제부터 요리 금지야.
자기가 올 때마다 냄비가 채워져 있으니 콩알도 살짝 의아해하긴 했다. 좀 더 의심해주고 내 의도를 눈치채 주길 바랬건만, 녀석은 거기까지였다. 불굴의 콩알은 이번엔 냄비가 필요 없는 음식에 도전했다. 무려 초코 브라우니를…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우리 집에는 오븐이 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녀석은 전기밥솥에 그것을 해냈다. 겉바속촉의 브라우니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밥솥 안의 브라우니는 일단 향은 달콤했다. 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컷팅했건만… 그 브라우니는 자신의 품 안에 하얀 밀가루를 재료 본연의 상태로 품고 있었다. 조용히 컷팅한 부위를 다시 덮었다. 나는 아무것도 못 본 것이다. 그 밀가루… 아니, 브라우니는... 그냥 수저로 퍼먹었다. 일단 뱃속에 투입시키면 소화 기관이 해결해주겠지 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뒤로 전기밥솥도 채워놨다.
그리고 며칠 후, 내 또라이가 이번엔 식빵과 그의 친구들을 데려왔다. 이젠 재료를 뭘 가져왔는지 보고 싶지도 않았다. 모르는 편이 그나마 나았다.
“선배님, 제가 맛있는 샌드위치 만들어줄게요.”
“...... 늘 느끼는 건데, 우리 국주는 참 세상을 열심히 사는 거 같아.”
“사랑해요. 선배님.”
“......”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냥 눈물이 나려고 한다.
놈이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음식은 맨 위와 맨 아래가 식빵이기는 했다. 아래 식빵엔 일단 딸기잼이 듬뿍 발라져 있었고, 그 위에 토마토, 위에 치즈, 위에 햄, 위에 양배추, 위에 브로콜리... 아 그 넘의 망할 브로콜리. 그리고 그 위는 또 딸기잼을 듬뿍 바른 식빵이 덮어져 있었다. 심지어는 딸기잼이 절절 넘쳐서 바닥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진정 궁금했다.
이것을 먹으라고 만든 것인지, 웃으라고 만든 것인지.
“국주야, 너... 샌드위치 안 먹어봤어?”
“왜요? 이거 별로예요?”
이걸 ‘별로’라는 단어로 퉁쳐도 되는 것인가.
“선배님, 원래 샌드위치는 맛있는 것을 쌓아서 만드는 거예요.”
응, 아니야. 샌드위치 그런 거 아니야. 도대체 딸기잼은 왜 쏟아 넣은... 아니다. 국주야, 우리 결혼하면 제발 요리만은 하지 말아 주라.
그 후 이야기 1
결혼 후 그의 첫 생일이었습니다. 니는 출근하는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지요.
“여보야, 생일 축하해요.”
그랬더니 그가 안겨있는 나를 우두둑 뜯어내더니 말했습니다.
“여보야, 내 생일이랍시고 미역국 끓인다고 깝치지 말아요.”
“그치만 여보야... 재료를 다 사놨는걸요?”
“내가 할게. 내가 하면 되잖아. 그리고 그 재료들이 미역국 재료가 맞긴 한 거야?”
아니, 미역국에 미역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 후 이야기 2
그는 야채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야채를 먹이기 위해 본격 김밥 싸기에 돌입했지요. 그도 처음 몇 번은 그냥 먹어주더군요.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저는 그날도 김밥을 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출근하다가 그 김밥을 보고 흠칫거리더군요. 그러더니 후다닥 뛰어서 현관에 있는 자기 신발을 손에 들고 냅다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네, 정말 신발도 안 신고 맨발로 튀었습니다. 허… 김밥을 양손에 들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니 놈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급하게 누르며 그 앞에서 신발을 신고 있더군요.
그래서 양손에 든 김밥을 그의 입에 직접 넣어줬습니다.
여보야, 아침은 먹고 가야죠.
그 후 이야기 3
밸런타인데이 때 만들어준 초코볼입니다.
저걸 회사에 가져가서 동료들과 나눠먹으라고 했더니 그가 기겁을 하며 말하더군요.
“여보야… 죽어도 못해.”
“왜요? 이거는 맛있어요.”
“여보야… 저건 맛이 문제가 아니야.”
그는 결국 저걸 차마 회사 안으로는 들고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혼자 다 먹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왜지? 뭐가 문제인건데?
그 후 이야기 4
“여보야, 나 요즘 글 쓴답시고 살림도 제대로 못 해서 어떠케.”
그랬더니 그가…
“괜찮아, 우리 여보야… 요리만 안 하면 돼요.”
알았어. 알았다고. 이제 고마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