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는 작가가 아니다
“편집자랑 작가랑 같은 것 아니에요?”라는 질문을 아마도 들어 본 사람도, 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애송이 시절의 나도 편집자와 작가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시점에는 나도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편집자와 작가는 완전히 다른 목표를 가진 직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첫 직장은 교육 출판 회사였다. 교육 출판이 무엇이냐, 교육 보조재인 문제집과 전집을 출판하는 회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중 내가 속했던 전집 출판 부서는 '교육'에 목표를 둔 도서류를 개발하였다. 이곳에서는 자유로운 작가의 창작물이 아닌 기획물을 다루기 때문에, 작가를 섭외하여 회사가 원하는 방향의 글을 쓰게 하고, 그림을 그리게 하여 출판한다.
입사 후 가장 처음 참여한 전집은 <유아 자연 관찰 시리즈>였다. 3~5살 유아를 위해 동식물의 사진에 자연 이야기를 덧붙여 만드는 기획 시리즈였다. 나에게 자리를 물려준 선배가 담당하고 있던 14권의 자연 관찰책을 이어서 맡게 되었다. 이미 전집 전체 기획, 책 구성 기획, 작가 섭외, 원고 초안이 완료된 상태여서, 나는 그다음 단계의 일들을 진행했다. 이야기에 맞는 사진 찾거나 찍어 오기, 디자인 기획서 작성하기, 활동 원고 작성하기, 교정 교열 보기 순으로 업무가 이어졌다.
매사 신나고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일들이 많았다. 끈끈이주걱이 자생하는 군락지를 찾아가서 사진을 찍고 온 일, 메뚜기와 개구리 사진을 찍어 주신 약간 괴짜 같은 사진작가님과의 만남, 커다란 정미소에 갔던 일, 버섯 연구소에 갔다가 이름 모를 버섯을 잔뜩 받아왔던 일 등 발로 뛰는 일들이 재미있었다. 밖에서 너무 신나는 시간을 보내고 오면, 사무실에서의 업무 시간이 괴로웠다. 사진 사이트에서 적당한 사진을 찾다가 마우스를 붙잡고 졸고, 전날 과음해서 숙취에 시달리다가 화장실에서 쪼그리고 잠깐 자고 오기도 하고.
선배들이 가끔 자연 관찰 전집은 10년에 한 번 만들까 하는 것이라, 대단한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할 때가 있었다. 정말로 그 후로 15년이 지났지만, 자연 관찰책은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정말 귀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 만난 다정한 선배들에게 배운 편집의 기술들은 지금까지도 내가 편집자로 월급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데 자연 관찰책 전집의 인쇄까지 무사히 끝내고 난 뒤,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인쇄 감리도 잘 다녀오고, 후가공* 처리까지 확인을 잘했는데 마지막으로 제본* 검수를 대충 하는 바람에 제본 사고가 난 것이다. 같은 책을 하도 여러 번 보니까 막판에 좀 대충 봤는데, 거기서 딱 사고가 생긴 것이다. 원고 초안 이후부터 같은 글, 같은 사진, 같은 그림을 100번 넘게 보고 나니, 너무나 지겨웠다. 그래서 제본 샘플이 왔을 때 휘리릭 넘겨 보고 말았는데, 그만 앞면지*와 뒷면지가 바뀌는 사고가 난 것이다. 문제는 면지와 같은 대수*에 플랩* 가공이 되어 있어서, 책을 모두 뜯어 낸 뒤 잘못 제본된 대수 전체를 새로 인쇄한 뒤 플랩 가공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아, 안될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눈물이 핑 돌았다. 다행히 막내 편집자에게 책임을 지라는 선배들은 없었고, 제작팀에서 업체와 협의를 잘해 주어 추가 비용이 없이 재인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15년 전 일을 회상하면서도 머리가 핑 도는 아찔함을 느낄 정도다. 기대작이라 초판*에 무려 1만 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첫 프로젝트가 끝나고, 누리과정* 커리큘럼에 맞춘 창작 그림책 시리즈, 초등 과학 교과서를 기반으로 한 과학 탐구 그림책, 인물 그림책 등 다양한 교육 출판물들을 기획하고 개발하게 되었다. 첫 직장에서의 6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스스로를 일잘러 편집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그쯤이 가장 자만할 때가 아닌가. 그래서 전집 출판물 중에 두세 권 정도에 직접 글을 써 보기도 했다. 편집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완벽하지 않은가! 내가 쓴 글은 기획에 딱 맞아떨어지는 정직한 글이었다. 이 정도면 나를 작가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근데 그게 그렇게 쉬웠다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작가 지망생이 있을까. 그 시절의 나는 작가보다는 일잘러 편집자라는 생각에 심취한 채 첫 직장을 퇴사했다.
일잘러의 편집 용어
* 후가공 : 인쇄 후 추가 작업을 통해 특별한 효과를 더하는 일. 플랩, 타공, 박, 톰슨 등의 작업이 있다.
* 제본 : 낱장으로 된 종이를 풀, 실 등으로 엮어서 책자로 만드는 일.
* 앞면지, 뒷면지, 면지 : 양장 제본(표지에 두꺼운 종이를 덧대어 튼튼하게 만드는 일 - 그림책 표지 등) 시, 본책과 표지를 붙이기 위해 존재하는 페이지. 앞표지에 붙는 면을 앞면지, 뒷표지에 붙는 면을 뒷면지라고 부른다.
* 대수 : 책을 만들 때 필요한 종이의 수, 일반적으로 앞뒷면 8쪽씩 16쪽을 1대수로 본다. 1대수 안에서 1쪽의 내용만 변경하려고 해도 같은 1대수에 있는 모든 쪽을 다 같이 인쇄해야 한다.
* 플랩 : (flap) 책 위에 종이 등을 덧대어 붙이거나, 두 겹으로 붙인 종이 중 한 장을 오려 내어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게 한 조작.
* 초판 : 처음으로 제작된 출판물. 1쇄는 보통 3,000부를 기준으로 한다.
* 누리과정 : 어린이집, 유치원 통합 교육 과정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