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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나무 Nov 03. 2022

산책은 어떻게 삶을 사랑하게 하나?

돌쟁이처럼 걷다

 "내가 요즘 산에 다니잖아. 꾸준히 다녀 이삼 년 됐어. 우리 딸이 좋아해. 집사람도 좋아하고...  집사람과 말이 안 통했거든. 나도 내 주관이 확실하고 집사람도 그래서 자주 큰 소리 나고 그랬지. 근데 이젠 월화수목은 집사람이 하고, 금토일은 내가  해. 세탁기 돌리고 청소하고 쓰레기 버리고 그런 거. 그게 편해. 내가 많이 해주니까 불만이 없어. 내가 하면 그 사람이 좀 편하겠지 해. 전엔 그걸 잘 몰랐어. 근데... 딸 방은 안 치워.

딸은 이상해. 심리 미술 하는 애가 방이 폭탄 맞은 수준이야. 그래서 언제 한 번 치워줬는데 되레 욕만 먹었어."

"당연하지. 딸이 성인인데 아빠가 방 치워주면 좋아하겠어? 네가 많이 노력하네."

"집사람 무릎 아프다고 산에 절대 안 갔는데 요샌 나보다 더 자주 가. 가면서 이런저런 집안 얘기 애들 얘기도 하고 좋아. 전망대 쉬는 데 있거든. 거기서 잠깐 쉬기도 하고... 누난 요즘 많이 걸어?"

"그냥... 공원? 음... 공원 걸으면서 음악도 듣고 그래. 난 대화가 힘들어. 말하면 싸움이 되니까 그냥 혼자 걷거나 어쩌다 같이 다닐 땐 말을 안 하고 걷지. 그것도 나쁘지 않아. 싸우는 거보다야 낫잖아?"

"왜 그래? 누나가 좀 잘해봐."

"어려워 나는... 그래서 더 걸어야 하고 지금 걷는 거고. 난 아들 방 치울 때 바닥만 치워, 그 외에 나머진 안 건드려. "

 

  5m 정도 뒤에서 나와 비슷한 보폭의 두 남녀가 걸으며 하는 대화다.  내  연배와 비슷해 보이는 두 남녀는 오누이 또는 아는 사람으로 추측된다. 대화 소리에서 벗어나고자 내가 빨리 걸으면 마치 그들도 빨리 걷는 것 같다. 내가 천천히 걸어도 이내  같은 간격이 유지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내 보폭에 맞춰가자 약속한 것처럼. 아무튼 나는 의도치 않게 그 둘의 대화를 십여 분 듣게 되었다.

  듣다 보니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다르면서 또 어느 부분은 우리 집 얘기를 하는 건가 하고 착각할 만큼 정말 많이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사는 것 거기서 거기라는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내가 주체가 아닌 타인이었을 때만 통하는 말이다.  멀리서 보면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똑같은 삶이 있을 리 만무하다. 내가 싫어하는 말 중 하나는 '다 똑같아. 남들처럼 사는 게 좋은 거야. 애들이 다 똑같지. 네가 잘하면 나도 잘해. 너는 왜 남들처럼 안 하는데? ' 뭐 그런 말들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타인은 자신의 기준에 맞게 살아주길 바란다. 그런 마음을 정제하지 않고 일상의 말과 행동으로 가볍게 말하는데서 가족은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것은 내 가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타인의 가족에까지 서슴없이 침범할 때 문제를 낳는다. 그중 내가 남으로부터 많이 들었던 말 중 가장 싫어했던 말 중 하나, "왜 그렇게 살았어? 나라면 그렇게 안 살았겠다"다. 그리하여 나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호수 한 바퀴를 돌아 음식점이 있는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돌쟁이 정도로 보이는 아기와 마주쳤다.  아기는 10m 앞에서 되똥되똥 걸어온다.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아기가 방긋방긋 웃으며 더 빠르게 다가온다. '아, 저렇게 급히 걸어오다 넘어지면 손뼉 친 나를 원망하면 어쩌지... ' 하는 찰나 아니나 다를까 서너 발자국을 떼더니 그만 앞으로 넘어졌다. 다행히 아기는 울지 않고 발딱 일어나 다시 또 내 앞으로 걸어온다.     그 모습을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는 부부의 얼굴에서 만연의 미소가 보인다. 아기가 다시 넘어지더라도 나를 절대 원망하지 않을 표정이다. 아기는 기우뚱 넘어질 듯했지만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내 바로 앞까지 와서는 나를 올려다본다.  순간 마치 세상의 모든 배경은 지워지고 오로지 그 한 아만 남은 것 같다. 나는 박수 한 번 쳐주고, 멋쩍어서는 "와! 너무 이뻐요! 몇 개월이에요? "하고 물었다. 부부는 14개월이라며 다시 한번 환한 미소를 짓는다.


  나도 첫아이가 막 걸음을 떼던 돌 무렵에 아이의 걷는 모습이 그렇게도 신기했다. 걷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행복했더랬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부와는 달리 아기가 넘어질라치면 빛의 속도로 달려가 바로 일으켰다. 그런 것이  옳은 것은 아니란 걸 육아서를 보며 아기가 걷기에서 자유로워질 때쯤에야 알았다. 그렇게 나는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것들을 어떤 것은 아이보다 너무 빨리 알아 조급해했고, 또 어떤 부분은 아이의 자라는 속도보다 늦게 깨달아 후회했다. 그래도 주위에 어른이 없어 오로지 믿을 만한 건 육아서와 맘카페였다. 지나 보면 조급함 없이 성장을 돕는 부모의 여유로운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란 걸, 나는 좀 늦게 알았다.

  요즘 산책길에서 아기들을 보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유차에 탄 아기를 보거나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보면 자꾸 쳐다보게 된다. 말도 걸어보고 싶다. 말을 못 걸을 땐 "우와! 천사다. 아가가 똘망 똘망 이뻐요!"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이런 말을 할 땐 나름 때와 장소를 가리며 아이 부모의 눈치를 봐 가며 한다. 아무리 좋은 칭찬의 말도 지나친 관심은 사람에 따라 불편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첫아이를 키울 때 아기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 처음 보는 어른들이 아기 귀엽고 예쁘다고 말 걸어주는 게 좋았다. 그러면 육아로 지쳐 울적했던 기분도 나아졌고, 아이를 잘 키워야지,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생각해 보면 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그 어떤 경험보다 귀한 일이며 삶에서 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보람있고 놀라운 체험인 것이다. 나 자신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무한한 가능성의 아이를 일정 기간 책임지는 것, 그 부담감은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책임감으로 왔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땐 그 책임의 무게가 어떤 종류인지 잘 몰랐다. 아마 몰랐기에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서 기른 것인지 모른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상상하기 어려운 놀라운 경험과 기쁨을 주는 동시에 그만한 무게의 책임감을 부모에게 지운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로 인해 일정 부분 성장의 책임과 의무를 질 수밖에 없다.

  나를 포함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유아기 아이를 양육하는 방식이 당장은 물론 사춘기를 지나는 아이에게,  또 그 아이의 삶 전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잘 모르고 덜컥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 같다. 설사 지식적으로 안다 해도 앎과 육아 실전은 똑같을 수 없기에 양육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에 봉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중 '불안'이라는 감정이 큰데 그건 자기도 모르게 타인들과 비교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크다. 내 아이가 뒤처질까 하는 불안감은 아이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게 만드는 큰 실수를 범한다. 그것만 하지 않더라도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아이를 기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아이는 전문가나 육아서가 다 말할 수 없는 지극히 고유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아이를 양육하면서 종종 느낄 비교에서 오는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있는 것이다.  암튼 다시는 그 시절로 가고 싶지 않지만 중년인 지금의 마음 상태로 아이를 키웠다면  아이가 더 편안한 상태로 자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에 느끼는 엄마들의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 싶다.

  또. 아이를 양육하지 않았으면 몰랐을지도 모르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나 상처는 아이를 양육하며 내 아이의 행동을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그런 것들은 아이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을 알아가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부모가 자식의 거울이고, 자식이 부모의 거울이라 하지 않았던가. 암튼 아이를 낳아 함께 성장하며 삶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 필연적이다.


  걷는 것, 돌을 지나면서 걷는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아기가 걷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독립적 주체로의 첫 단추를 끼는 것이니까.

  갱년기에 들어서며 자주 걸으며 느낀 것 또한 돌쟁이가 독립적 주체로 첫 단추를 끼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두 다리로 혼자 걷기 시작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삶을 주체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려는 자이다.  아기들은 걷기 시작하면서 온 세상에 품은 호기심을 채워가듯, 나도 요즘 걸으며 보는 것들 모두가 그렇게도 새롭다. 


나는 그래서, 요즘 돌쟁이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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