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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나무 Jan 28. 2024

보건실 시

고약한 친구

하루에 여섯 번

일 년이면 이천 백 구십 번

나를 아프게 하는

아이가 있어요


물을 먹으라 하면 물을 먹고

많이 먹으라 하면 많이 먹고

먹지 말라고 하면 먹지 않고


선생님 말보다

엄마 말보다

그 아이가 더 무서워요


내 몸속에 있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말을 안 들으면

나를 더 괴롭히는 고약한 친구


오늘도 나는

내가 그 아이인지

그 아이가 나인지

알 수 없어요


가죽처럼 빳빳해진 손가락이

내 손가락인지

그 아이의 손가락인지

열 손가락에 그 아이가 사는지

그 아이의 손가락에 내가 사는지


인슐린이 당을 먹는지

당이 인슐린을 먹는지

당이 나를 살리는지

당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알 수 없어요


어느 날,

‘당뇨’라는 고약한 친구가 내 몸속에 들어온 후로

나는,

하루에 여섯 번 다시 살고

일 년이면 이천 백 구십 번 새로 태어나요


5년 전쯤 소아 당뇨를 앓고 있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 자동 주입기가 용화되지 않았던 때인데요. 그 아이는 사춘기를 맞이하며 혈당이 오르락내리락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가락을 찔러 혈당을 측정했어요. 손이 가죽처럼 빳빳해져 피가 잘 나지 않는 날도 있었죠. 그 아이를 매일 두 번씩 만났는데 그때의 마음을 썼던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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