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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나무 Jun 22. 2024

두 번째 사춘기

까치의 집 짓기와 걷기

어느 날, 산책길에서 집 짓는 까치를 관찰한 적이 있다


까치는 제 몸보다 기다란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나뭇가지 사이사이를 날아오르며 집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은사시나무 아래 벤치에 작정하고 앉아 까치의 집 짓기를 관찰했다. 까치는 제 몸보다도 긴 나뭇가지를 부리에 물고는 중간중간에 쉬어가면서 나뭇가지 사이사이를 나선형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곤 맨 꼭대기 짓고 있는 집에 도착하자 부리에 물었던 나뭇가지를 조심해 얹었다. 그렇게 매번 최선을 다해 날아올랐지만 둥지에 나뭇가지를 내려놓는 순간 애써 올린 나뭇가지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러자 까치는 땅으로 내려와 그 나뭇가지를 찾으려는 듯 그 주변을 이리저리 탐색했다. 그러다가 찾기를 포기했는지 시야에서 사라졌던 까치가 잠시 후 비슷하게 생긴 나뭇가지를 물고 나타나서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나뭇가지를 옮겨가며 둥지를 향해 차근차근 날아올랐다. 그렇게 까치는 나뭇가지를 주워와 올려놓기를 반복했는데 몇 번이나 떨어뜨리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날 까치의 집 짓는 모습을 지켜보며 원래 까치는 그렇게 실수가 잦은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그 까치가 어리숙한 까치인가,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얼마 후 어떤 인터넷 기사를 읽다 보니 '재밍'이 일어나지 않는 초반엔 까치집을 지을 때 원래 그렇게 고생을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기초가 튼튼해지면 쉽게 둥지를 쌓는다고 한다. 그러니 그날 내가 관찰했던 까치는 집을 짓는 초반이어서 다 물어간 나뭇가지를 둥지에 놓을 때 자꾸 떨어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까치는 집을 지어본 경험이 없어도 나뭇가지를 많이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전봇대나 신호등에도 집을 짓기에 까치는 처음부터 집 잘 짓는 집짓기 선수 같아 보였지만 사실 까치도 실수를 반복하며 실력을 갖추는 것이다. 누구든 다 된 결과물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걸 우린 너무 자주 하지 않나 말이다. 나도 새들은 나서부터 집짓기 선수라고만 생각한 것이다.

한 번은 산책로에서 까치집이 통째로 떨어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사실을 알고부터는 숙련되지 않은 까치가 짓다 만 집일 수도 있겠,라고 생각다.


까치의 집 짓기는 사람들의 삶과도 닮았다. 우리도 어떤 일을 할 때 미숙련 상태에서는 실수를 연발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숙련이 되면 실수를 덜 하게 된다. 새들마다 집 짓기의 재료를 자신의 몸에 맞게 다르게 선택하듯, 우리 삶을 이루는 재료 선택도 사람마다 다르다. 또, 까치의 집 짓기에서 둥지까지 오를 때 쉬어가는 타이밍이 까치마다 다르듯 우리의 '쉼'의 시점도 같을 수 없다. 까치는 긴 장대를 물고 날 때는 절대 한 번에 날아오르지 않는다. 더 자주 쉬며  차근차근 날아오른다. 또, 한참 집을 짓고는 제법 긴 휴식 시간도 갖는다. 떨어뜨린 나뭇가지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우리도 무엇을 향해 나아갈 때 까치의 집 짓기와 같았으면 한다. 자주, 많이 쉬더라도 집이 집으로써의 역할을 하도록 자신만의 방식으로 집 짓기를 멈추지 않는 새들처럼 무엇을 할 때 조금씩 쉬어가며 멈추지 않는 방식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완전히 멈추는 것과 쉬어가는 것은 다르다. 자주 쉬는 자가 끝까지 이루어낼 수 있다. 목표물 주변을 벗어나지만 않으면 말이다.

대단한 능력자가 아닌 평범한 나는 무엇을 할 때 늘 시간을 들이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 것, 나는 이 두 가지로 살아온 것 같다. 자주 쉬고 멈추지는 않는 것 이 두 가지 말이다. 결국 그것이 가족을 포기하지 않게 했고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한 내 직업을 이어갈 수 있게 했다. 까치는 자신이 선택한 나뭇가지를 놓치긴 했지만 일부러 버리지는 않는 것 같다. 쉬어가되 포기하지는 않으면 자신만의 둥지를 만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까치 한 마리가 나무 사이사이를 곡예하듯 날아가며 공중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멀리 점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무 사이로 걸어간다. 걸아가는 한 사람은 까치 백 마리보다 존재의 밀도가 크게 느껴진다. 사람은 무생물에게까지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이기에 그 어떤 동물보다 아름다운 존재라는 건 명제다. 특히 걷는 것은 사람이 가장 사람다움을 증명한다. 즉, 아름답다는 어원처럼 '나답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아름다워지고 싶어 걷는 것인지 모른다. 내가 가장 나다울 때는 걷는 것일 때라는 걸 꾸준히 증명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내가 매일 걷는 것이 까치가 나뭇가지 한 개를 입에 물고 둥지에 오르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라도. 아니, 내 삶에서 그보다 더 작은 밀도일지라도 나는 걷기에 정성을 기울인다.  그래서, 내게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시간의 대부분은 걷기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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