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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나무 Jun 26. 2024

일상 에세이

보건실 단골 아이와 토마토

1, 2학년 내내 단골이었던 지희(가명) 3월 초 등굣길에 건실  와서는 닷없이 내게  줄 게 있단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진흙 덩이 3개를 내민다, 토마토 씨앗이란다. 진흙덩이 속에 토마토씨앗이 들어있는 건 처음 알았다.


나는 날이 따스해지면 심겠다며 씨앗을 받아 서랍에 무심히 넣었다.

그렇게 2주쯤 지났을까. 점심시간에 그 아이와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나를 보자마자

"선생님, 토마토 심었어요?" 한다

나는 사실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아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생각해 냈다.


"응, 이제 심으려고 했어."


그러고 또 2주 지났을까, 지희가 배가 아프다고 왔다. 아... 희가 보건실에 들어서자 이번엔 잊은 게 아닌 내가 토마토 씨앗을 방치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젠 정말 미안해졌다.

그 짧은 찰나에 나는 시선을 회피하며 적당한 말을 찾아냈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토마토를 심어야겠다 굳은 마음(이건 진실)과 함께. 그리고 지희가 들으면 기뻐할 만한 말을 또 얼른 생각해 냈다.


"지희야, 오늘 오후에 씨앗 심으려고 흙도 사 왔단다."

"네"

지희는 대답은 했으나 나를 믿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냥 믿어주는 표정으로 보였다.

그렇게 나는 3월이 바쁘다는 핑계로 지희가 준 씨앗을 한 달이나 미루다가 그날 오후에 씨앗을 흙에 묻었다.


지희가 오면 씨앗을 심기로 한 날 약속을 지켰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지만 화분에서 얼마 후에 싹이 나는지도 궁금했기에 화분에 날짜도 써 붙였다.


'토마토 심은 날, 4월 9일'


그로부터 2주 후 월요일 아침, 출근해 창문을 여는데 보건실 창가에 놓아둔 화분에 다글다글 토마토 새싹이 올라왔다.

내가 받은 씨앗은 지희 손톱 만한 흙덩이 3개였는데 토마토 새싹이 무려 10개는 돼 보였다.


겨우 손가락 마디 한 개 만한 새싹들을 발견하곤 월요일 내내 기분이 좋았다.


그날 희가 보건실에 오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단골 아이가 보건실에 오길 기다라긴 보건교사를 하면서 처음이다. 그날 지희가 보건실에 오진 않았지만 점심시간에 급식실 앞에서 마주쳤다.


"토마토 구경하러 올래?"

"네?"

"지희가 준 씨앗이 드디어 싹을 틔웠단다."

지희가 눈이 똥그래져서 나를 쪼르르 따라왔다.

화분을 들여다 보더니 싱글벙글 입이 귀에 걸렸다.

"와! 신기하다 신기해! 진짜 싹이 났네."

"지희야, 너 1학년 때 맨날 배 아프다고 보건실에 왔던 거 기억나? 2학년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 뭐"

"네 알아요."

"이 토마토는 어느 정도 자라면 햇볕 더 잘 들고 바람도 부는 바깥 화단에 옮겨줄 거야. 더 튼실하게 자라서 토마토 열리라고."

"네"


그로부터 몇 주 후 토마토가 내 손가락 길이만큼 자랐다. 보건실 앞 화단에 모두 옮겨 심었다. 토마토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6월 중순이 되자 노란 꽃들이 앙증맞게 피었다.

"지희야 토마토 꽃 핀 거 봤어?"

"정말로요?"

"그래, 지희 밖에서 놀다 들어올 때 토마토 관찰하고 토마토 열리면 알려줘"

"네"

"토마토 익으면 지희가 따먹고"

".... 선생님이 심은 건데요..."

"그래 그럼 너랑 나랑 다 따먹을까?"

지희가 호호 깔깔 웃으며 보건실을 나갔다.



나는 요즘 출근하면서 보건실에 들어가기 전에 토마토를 보고 간다. 지희는 급식실에서 밥을 먹고 나올 때 자주 토마토를 보고 간다고 했다.


작은 토마토 씨앗으로 나는 지희와 몇 개월에 걸쳐 이야기를 한다. 아프다는 말이 아닌 토마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주 작은 행복감을 준다. 지희가 건네준 토마토가 의외의 기쁨을 주리라고는 나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년 봄에는 내가 씨앗을 사 와서 단골 아이들에게 보건실 화분에 심어 보게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싹이 올라오면 바깥에 놓아 키워야겠다.  햇빛, 바람, 비를 듬뿍 맞고 자란 식물은 얼마나 튼튼하게 자라는지 알려주고도 싶다. 힘들다 힘들다고 오는 아이들에게 말이다. 공부시간만 되면 배 아프다 머리 아프다고 꾀병 아닌 꾀병으로 보건실문이 닳도록 오는 아이들에게 말이다. 바깥에 나가서 네가 심은 식물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고 교실로 가라고 해야겠다.


'답답할 땐 보건실에 꼭 안 와도 돼. 머리가 아픈 거 같을 때, 스트레스받는 거 같을 때 말이야. 네가 심은 씨앗이 싹이 텄나, 얼마나 자랐나, 꽃이 피었나, 열매가 맺었나 보고 가렴... '하고 말해야겠다.


"토마토는 말이지 흙, 바람,비를 맞아야 태양을 닮은 튼실한 열매를 맺는단다. 지희는 토마토보다 잘 견디는 사람이란 걸 선생님은 믿을 거야."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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