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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짓는남자 Jan 16. 2020

방구석을 좋아합니다

내성적이지만 충분히 잘 살고 있습니다 #24

내향인에게  밖의 모든 세계는 우범 지대이다. 내향인을 피곤하게 하는 요소가 즐비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밖에만 나가면 신경 쓰이는 요소가 하나둘 늘어난다. 방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요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외부 세계는 피곤한 곳이다.




나는 방구석을 좋아한다. 방에 한 번 틀어박히면 밖에 나가지 않는다. 집 밖은 위험하니까.

나는 집에서 한 발짝만 나가도 피곤이 몰려온다. 집 밖에 나가면 몸이 즉시 반응한다. 집 밖에만 나가면 멀쩡하던 눈에 뭐가 끼인 것처럼 갑자기 뻑뻑하고 뿌옇게 된다. 눈이 급 피곤해진다. 바깥공기가 이상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것뿐이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에너지가 소모되고, 피곤을 느낀다. 사람들과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왜 에너지가 소모되냐고? 뇌가 가동하니까 그렇다. 이쪽저쪽 휙휙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는 순간 시각 정보가 뇌로 전달된다. 뇌는 그 정보들로 달리 무얼 하지 않아도, 인식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그래, 여기까지는 좋다. 멍 때리면 되니까. 문제는 그다음이다.

밖에 나가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목적지가 있을 것이다. 목적지에 가려면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면 에너지가 소모된다. 이때 몸 자체를 움직이기 위한 에너지 소모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기 위한 정신적인 활동이 문제가 된다. 몸이 어딘가 향하고 있다는 건, 그 이면에는 뇌가 끊임없이 활동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사람들을 피하고, 차에 타고, 계단을 오르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려면 뇌에서 쉴 새 없이 명령을 내려야 한다. 명령을 내린다는 건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게 문제다. 내가 집 밖에만 나가면, 달리 누굴 만나지 않아도 피곤을 느끼는 이유다. 여기에 누군가를 만나면? 더욱 피곤해진다.

이래서 학창 시절에는 방학을 하면 한 달 내내 밖에 나가지 않았다. 우리 집은 단독 주택이었는데 마당에도 나가지 않았다. 마당이 뭔가, 방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밥 먹을 때와 용변을 볼 때 말고는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방에만 있으면 답답하지 않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마음이 편하고, 에너지 소모도 거의 되지 않아서 유토피아가 따로 없었다.




내향인에게 방 밖의 모든 세계는 우범 지대이다. 외부에서 범죄가 일어난다는 면에서 우범 지대가 아니라, 내향인을 피곤하게 하는 요소가 즐비하다는 점에서 우범 지대라는 뜻이다. 거실이든 집 밖이든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피곤한 장소다. 방 밖에만 나가면 신경 쓰이는 요소가 하나둘 늘어난다. 방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요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외부 세계는 피곤한 곳이다. 별 걸 다 피곤해한다고? 맞다. 별 걸로 피곤을 느끼니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걸 선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방 밖을 선호했겠지.

내향인에게 방은 가장 안전한 공간이다. 다른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나 자신 말고는 신경 쓸 게 없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고, 신경 쓰게 하는 요소들에 신경 쓸 일도 없다.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든, 뒹굴거리며 TV 프로그램을 보든, 영화를 보든, 잠을 자든, 책을 읽든 시간의 흐름에 힘 안 들이고 몸을 맡길 수 있다. 방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안식처이다.

그래서 내향인은 방 밖에 나가길 꺼려한다. 방 밖에만 나가면 피곤하니 나가기 싫다. 나가기 싫어서 웬만하면 집에만 있는다. 쉬는 날은 가능한 한 약속을 잡지 않는다. 심할 경우 용변을 제외하고, 먹는 것과 자는 것 모두를 방 안에서 해결한다. 방 안에서 자기만의 시간에 몰입한다. 외향인이 보기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아무 이상 없다.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다.

내향인의 방콕행은 질풍노도와 같은 청소년기의 반항이나 격변의 행위가 아니다. 외부와 철저히 단절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는 오타쿠 같은 행동이 아니다. 단지 그게 편해서 그러는 것뿐이니다. 에너지 소모가 적어서 그러는 것이다. 신경 쓸게 전혀 없고, 신경 쓸 게 없으니 피로가 쌓이지 않아서 방 안에 있는 걸 선호하는 것뿐이다. 몸과 마음을 가장 편하게 할 수 있어서 방에만 틀어 박혀 있는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학창 시절이 매우 그립다. 방학이 있으니까. 방학 동안에 방구석에서 나만의 자유와 쉼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으니까. 성인이 된 지금은, 아니 직장인이 된 지금은 그러한 자유와 쉼을 누릴 수 없다. 직장인에게도 방학이 있으면 좋겠다.

그래도 주말에 이틀을 쉬니 다행이다. 예전에는 주 5일제가 아니어서 토요일에도 출근을 했다. 기본 오후 1시까지 근무, 연장근무를 하는 날은 평일과 똑같이 6시 퇴근. 그때는 정말 싫었다. 오전에 반짝 일하려고 몇 시간씩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싫었고, 무엇보다 자유와 쉼을 누릴 시간이 그만큼 줄어 드는 게 너무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틀을 온전히 쉴 수 있으니 너무 좋다! 물론 방학에 비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기분을 짧게나마 느낄 수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주말이 기다려진다. 하루하루 지나고 주말이 가까워지면 설레인다. 아, 주말이 이틀 남았다. 이틀만 이 악물고 버티자. 갑자기 주말 예찬론으로 글이 마무리되는 듯한데, 이 글은 내향인의 방구석 예찬론이었다는 걸 잊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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