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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Nov 14. 2022

인간과 디오니소스의 융합

우리는 ‘술’하면 떠오는 게 뭘까? 긍정적 느낌이 들까, 아니면 부정적 느낌이 들까? 대부분 부정적 느낌이 들 것이다. 음주는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이다. 비싼 술값, 건강상의 악영향, 사회 무질서. 이 세 가지는 금주가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도 금주법을 적지 않게 제정해 시행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문화권,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 이슬람 문화, 미국과 캐나다, 인도, 러시아 등의 금주법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는 문헌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술을 옹호할 것 같은 애주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술의 긍정적 이미지는 뭐가 있을까? 애주가에게 왜 술을 마시냐고 물어보면 자신에 찬 명확한 대답을 하기보다는 그냥 말을 얼버무릴듯하다. 


여하튼 술이 나쁘고 백해무익하다는 통념에도 불구하고 술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 인간과 늘 함께 있었다. 이런 술을 인간은 마시고 취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 인간은 술을 마시고 취하고, 그런 취함을 좋아할까? 이 질문은 술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특별한 무언가가 있고, 취함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어떤 기능을 한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렇다면 취함의 기능은 무엇인가? 취함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인간이 겪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취함의 기능을 묻는 말에 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즉, 취함과 관련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다. 취함과 관련해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간은 어떤 어려움을 겪는 존재인가? 정답부터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적어도 겉으로는 이기심 없는 사회적 곤충처럼 행동하는 듯한 이기적인 유인원이다. 인간은 자신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의적이고 체계적으로 술에 취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여러 신을 모시는 신전인 그리스 판테온에는 아폴로(Apollo)와 디오니소스(Dionysus)라는 두 신이 있다. 이 두 신은 자기통제와 자유분방 사이의 긴장을 의인화한다. 태양신 아폴로는 합리성, 질서, 자기통제를 상징한다. 예술에서 아폴로 방식은 자제와 우아함, 세심하게 설계된 균형을 특징으로 한다. 아폴로는 지정된 사원에서 근엄하고 형식적인 공물로 숭배를 받는다. 디오니소스는 술, 취함, 다산, 감정, 혼돈의 신이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과도함, 황홀한 고양, 변한 상태를 탐닉한다. 디오니소스의 숭배자 중에는 유명한 마이나데스(Maenades)라는 여신들도 있다. 이들은 오늘날로 치면 거나하게 취하고 떠들썩한 파티 같은 바카날리아에 은밀히 모이는 광란하는 여신들이다. 

디오니소스와 마이나데스

이 두 신 중에서는 우리 인간 사회에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두자는 것이 슬링거랜드 교수가 《취함의 미학》에서 내놓는 생각이다. 이때 우리는 그 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그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이는 마치 우리 집에 아무나 들어오도록 항상 문을 열어 둘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온다면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술 금지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어떤 정책을 펴고, 의사 협회에서 어떤 처방을 내리든 간에, 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술은 항상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우린 항상 술을 우리 집 안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받아들이기 전에 그 술을 정확히 알아야 하고, 왜 우리가 술을 마시고 취하는 것을 좋아하는지를 그 근본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낭패를 보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와 디오니소스는 우리 집에서, 그리고 우리 인간 사회에서 재회한다. 인간과 디오니소스는 협업하고 융합하고 통섭할 것이다. 이 둘의 통섭과 융합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 《취함의 미학》이 추구하려는 것이다. 어떤 두 사람이 서로 협업한다고 할 때 아주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두 사람 모두 각자 고유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특징이나 장점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만 장점이 있고 나머지 한 사람은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다면, 그것은 통섭이라기보다는 자원봉사이자 재능기부에 그칠 것이다. 이는 크게 효과적이지 않은 통섭이다. 이는 정확히 말해 통섭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간과 디오니소스의 통섭을 이룩하기 위해 디오니소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지만 우리 인간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인간은 디오니소스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그냥 둘이 같이 오순도순 말벗이 되고자 초대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디오니소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를 초대했고, 그런 인간의 초대에 디오니소스가 응한다. 인간은 어떤 일 때문에, 어떤 자기만의 문제 때문에 디오니소스에게 도움을 청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 글에서 내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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