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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Nov 10. 2022

술취함의 취향에 대한 납치와 숙취 이론

술취한 원숭이 가설

슬링거랜드 교수가 《취함의 미학》에서 받아들이는 견해는 아니지만, 흔히 통용되는 술취함의 인간 취향을 설명하는 두 이론을 이제부터 이야기해 보려 한다. 우리는 간절히 원했던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루고 나면 그 성취감으로 인해 기분이 좋아진다. 이는 그런 성취감으로 인해 우리 뇌에서 엔도르핀 같은 보상용 화학물질이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은 엔도르핀을 얻기 위해서는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노력을 해서 무언가를 이뤄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일을 열심히 하고 싶지는 않고, 그러면서 기분은 좋아지고 싶다면 손이 가는 것이 바로 술이다. 이처럼 술은 ‘노력’이라는 인간의 미덕을 배제하므로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진화는 적당량의 술로 적당히 취하는 것은 묵인해 준다. 영장류가 정글 바닥에서 우연히 발효된 과일로 가끔 취하는 것은 봐준다. 여기까지는 진화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불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고 그런 도구 사용에서 얻은 문화적 혁신이 축적되면서 오늘날의 인간은 강력한 증류주를 만들어 마시게 되었다. 인간은 이제 독한 증류주로 취하려는 욕구를 충족한다. 강력한 증류주로 엄청 많은 양의 엔도르핀으로 보상을 받고자 한다. 그래도 독한 술은 진화의 방어망을 빠져나갔는데, 이것이 진화의 오류이고 진화의 실수이고 진화가 고장 났다는 납치 이론의 주장이다.


술취함에 대한 인간의 취향을 설명하는 숙취 이론은 ‘적응’의 개념에 바탕을 둔다. 어떤 인간의 행동이 지금은 유용하지 않고 심지어는 나쁜 것이기도 하지만 원래는 적응적 목적상 바람직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숙취 이론이다. 숙취란 술에 들어있는 알코올이 대사되고 작용하는 과정에 의해 두통, 메스꺼움, 구토 등의 증상을 일으키는 부작용을 말한다. 술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숙취를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 전날 친한 사람들과 같이 마셨던 술과 술자리는 분명 즐겁고 유쾌했을 터이다. 즉, 처음의 적당한 양의 술은 적응상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긍정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다음 날이 되면 그 부작용은 전날 마신 술을 후회할 만큼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법이다. 이런 숙취 이론은 술취함의 취향뿐만 아니라 현대인이 정크푸드를 쉼 없이 즐겨 먹는 인간 행동도 설명할 수 있다. 적응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은 정크푸드를 과하게 먹으면 비만 등의 부작용이 있다. 하지만 농업혁명 이전의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어땠을까? 지방이나 설탕이 함유된 고밀도 열량 음식을 구하기 힘들었던 그 시대에는 우연히도 그런 먹을거리를 발견하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섭취했을 것이다. 이는 진화적 적응의 목적에 부합하는 바람직한 인간 행동이었다.


술취함의 인간 취향이 진화의 실수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인간 취향을 옹호하는 것이 이 두 이론이다. 이 이론들이 내놓는 술취함의 장점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특히 숙취 이론은 술취함이 처음에는 적응적 인간 행동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적응하기 힘든 부작용을 유발한다는 것이므로, 이 이론에서 술취함의 장점은 그 부작용은 무시하고 처음의 적응적 측면만 부각하면 쉽게 포착이 된다.


익은 과일을 두고 효모와 박테리아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 익은 과일에서 당이 나오면, 효모는 공기와 힘을 합쳐 알코올을 생산한다. 반면 박테리아는 알코올에 약하므로 과일의 영양분을 얻기 위해 효모와 경쟁한다. 서로 살기 위한 효모와 박테리아 간의 치열한 화학전이다. 이 전쟁에서 효모가 승리하여 자연 발효가 진행되어 알코올이 나온다. 로버트 더들리(Robert Dudley)는 당류(糖類)의 알코올 발효로 얻어지는 무색투명한 휘발성 액체인 에탄올이 영장류가 알코올에 대한 취향을 얻게 된 열쇠라고 주장한다. 이 에탄올은 휘발성이 강하여 공기를 통해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우리 영장류 조상은 알코올 분자의 향기를 따라 잘 익은 과일이라는 진귀한 상을 찾아낼 수 있었고, 소량의 알코올로 고품질의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었다. 이처럼 숙취 이론에서 알코올을 옹호하는 이유는 영양분이 많이 부족한 우리 영장류 조상에게 알코올이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숙취 이론을 더들리는 술 취한 원숭이(drunken monkey) 가설이라고 제안한다. 이는 인간이 술을 좋아하는 내력이 수백만 년 전 유인원 조상이 발효된 과일을 골라 먹던 데서 시작됐다는 가설이다. 

술 취한 원숭이

숙취 이론에서 말하는 알코올의 또 다른 장점은 곡물과 과일의 발효가 칼로리를 더 오래가고 휴대하기 쉬운 형태로 전환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 영양학자 플랫(B.S. Platt)은 옥수수 같은 곡물을 발효시키면 필수 미량영양소와 비타민 함량이 거의 두 배로 증가하는 것을 관찰했으며, 그는 이를 ‘생물학적 고상화(biological ennoblement)’라고 불렀다. 알코올음료는 칼로리 밀도가 매우 높은데, 이는 ‘모든 잔에 한 끼씩’이라는 흑맥주 기네스의 캐치프레이즈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외에, 알코올은 박테리아를 죽이도록 설계되어 살균 특성이 있고, 물을 소독하는 효과도 있다.


알코올이 우리 뇌의 보상 체계를 납치하여 그 체계를 작동시키는 것으로 보는 납치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술의 장점은 뭐가 있을까? 2022 US오픈 테니스대회 남자 단식 결승에 카를로스 알카라스와 카스퍼 루드가 올라왔다. 결승전은 세트 스코어 3 대 2(6-4, 2-6, 7-6, 6-3)로 알카라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승리의 순간 알카라스는 뇌에서 엔도르핀 같은 보상용 화학물질이 나와 더 없는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반면, 총 경기 시간 3시간 20분 동안의 혈투 끝에 최선을 다했지만 패배한 루드 선수는 우울하고 참담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 루드 선수에게도 기분을 업시키기 위한 보상은 필요할 것이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그런 보상이 될 것이다.

 

이처럼 숙취 이론과 납치 이론이 술취함에 대한 긍정적인 부분을 부각한다는 점은 높이 인정하지만, 그런 인간의 취향을 진화의 실수로 본다는 점에서 이 두 이론의 불완전성이 드러난다. 특히 숙취 이론의 경우 취한 이후의 숙취에 따른 비싸고 혹독한 비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함구한다.


숙취 이론은 숙취 이전의 술이 가져다주는 장점만 말하고 있다. 물론 술은 영양가도 있고 소독도 하고 맛도 좋다는 점에서 유용한 역할을 한다. 문제는 이런 기능이 술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생물학적 고상화를 위해 곡물을 반드시 술로 발효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곡물을 죽으로 발효시켜도 된다. 즉, 발효된 죽도 술만큼 영양가가 있고, 그 죽을 덩어리로 굳게 해서 나중에 먹을 수도 있으므로 식량 보존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그리고 물을 소독하기 위해 술을 사용한다고 하지만, 박테리아가 득실거리는 물이라면 그냥 끓여도 이 문제는 해결된다. 이처럼 숙취 이론은 그 설명이 깔끔하지 못하고 더운 여름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가 아닌 미지근하고 냉랭한 맥주의 맛이 난다.


술취함에는 분명히 비용과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문화적 진화 속에서 오수, 미세한 영양소의 부족, 또는 음식 보존의 문제에 대한 대체 해결책이 빠르게 발견되고 이용되어 술을 즐겨 마시는 인간의 행위는 멸종되었을 것이다. 다른 말을 보탤 것도 없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 인간은 자발적으로 우리의 마음, 특히 우리의 뇌를 알코올로 독살하려 하는가? 우리의 뇌를 파괴하는 이 입속의 적을 방어하는 수단이 있음에도 우리는 왜 그 적을 방어하지 않고 무찌르지도 않고 그냥 두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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