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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Jan 10. 2023

디오니소스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2022년 9월 20일, 에드워드워 슬링거랜드의 《Drunk》(2021)를 내가 우리말로 옮긴 《취함의 미학》이 출간되었다. 출간되자마자 연합뉴스에서 〈인류가 아득히 먼 옛날부터 술을 마신 이유는?〉라는 제목의 서평을, 그리고 며칠 뒤 중앙일보에서는 〈이성을 망치는 술은 진화의 실수? “문명 창조의 기폭제였다”〉라는 제목으로 서평을 써 주었다. 책 내용을 잘 살펴서 써 준 호의적인 서평이었다. 이 외에 매일경제에서도 〈취하려는 욕망? 진화의 ‘실수’가 아니라 ‘성공’〉이라는 제목으로 책 내용을 짧게 소개해 주었고, SBS에서도 책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는 방송이 나왔다. 출판사 대표님과 나는 이런 반응에 기뻐하면서 신문사와 방송사에 고마움을 마음으로 전했다. 


며칠이 지나자 출판사 대표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두 신문사에서 실은 서평에 댓글이 달렸는데, 그 댓글 내용이 너무 악의적이라는 것이다. 몇 가지만 소개하면, “주류회사들의 후원으로 책을 썼나?”, “술은 인생을 망친다. 무슨 문명 창조의 기폭제인가?”, “그럼 술이 나쁜 점은? 기억이 안 나겠지, 취해서”, “술이 얼마나 안 좋은 건데 대화가 안 되고 뇌가 제멋대로 굳어가는데 술이 뭐?” 등이었다. 처음에는 책도 다 읽지 않고 이렇게 악성 답글을 단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니 이들의 악성 답글이 이해되었다. 술의 해악이 우리 삶에 너무 팽배해 있으므로 술을 미화하는 책이 출간되니 모두 이해를 못 했을 것이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종 원고의 편집이 거의 마무리가 되는 시점에 책 제목을 어떻게 정할지 출판사 대표님과 많이 고민했다. 원서 제목을 그대로 하면 ‘술취함: 우리는 어떻게 술을 홀짝홀짝 마시고, 춤추고, 비틀거리며 문명으로 들어갔는가’이다. 제목과 부제를 합치니 너무 길어져 다른 제목으로 가기로 하고 그 대안을 고민했다. 처음에 생각했던 제목으로는 ‘술취한 문명과 술의 인지 혁명’, ‘술취한 마음: 술의 인지 혁명’, ‘술취한 이성: 술의 인지 혁명’, ‘드렁크: 술취함의 역설’ 등이었다. ‘인지 혁명’이라는 용어를 꼭 사용하고 싶었는데, 출판사 대표님은 독자에게 쉽게 와 닿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제목을 더 고민했다. 책 내용이 술취함의 사회적·개인적 장점을 크게 부각하므로 책 제목을 ‘취함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책 제목으로서는 좀 밋밋해 보였다. 다른 책을 보다 ‘미학’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고, ‘취함의 미학’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 대표님도 이 제목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웃으면서 너무 좋다는 반응을 보여 주었다. 


그렇다, 책 제목만 딱 보니 술취함이라는 해악이 아름답다고 묘사해 놓았으니 그런 악성 답글이 달릴 만도 했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무조건 술의 신 디오니소스처럼 행동하도록 권하는 듯 보인다. 술이 이렇게 유익한 것이니 음주 행위에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마음껏 술을 마시라고 말이다. 하지만 저자 슬링거랜드는 마지막 장에서 음주 행위에 따른 도덕적 문제를 지적하면서 적절한 음주 방식을 설명한다. 특히 현대의 증류 기술과 사회적 고립인 혼술 문제를 언급한다. 저자는 독한 증류주에 탐닉하는 것과 혼술을 음주 행위의 문제점으로 보는 것이다. 


술은 인간의 창의성을 증대하는 데 역할을 한다고 했다. 인간의 창의성을 증대한다고 할 때 인간 이성의 중심지인 전전두피질을 잠시 작동 중지하여 냉철한 이성과 차가운 인지를 잠시 내려놓게 해야 한다. 잠시 그렇게 하려면 독한 증류주가 아닌 약한 발효주가 적합할 것이다. 물론 독한 증류가 그런 역할을 하려면 많은 양이 아닌 적은 양만 투입해야 한다. 창의성을 위해서는 이성의 힘이 약해져야 하고 정서의 기능은 강해져야 한다. 많은 양의 독주는 정서의 기능마저 마비시켜 버리기 때문에 창의성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몸만 상하게 할 뿐이다. 


술은 집단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술 자체는 위험하다. 그래서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이 함께 마시면서 상대방이 마시는 양을 서로 모니터링해 주어야 한다. 혼술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우므로 혼술의 위험성에 대해 저자는 이야기한다. 물론 혼술의 경우에 자신을 통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어느 정도의 이성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므로 혼자 술을 마실 때 독주가 아닌 약한 술을 마셔야 한다. 이처럼 마지막 장에서 증류와 고립(혼술)의 개념으로 저자는 술에 대한 책임감 있는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디오니소스를 길들여 우리 삶에 받아들이라고 제안한다. 술은 금지된 물질이 아니라, 개인적·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고 미적 쾌락의 원천이기도 하다. 저자는 기원전 7세기로 추정되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전하는 33편의 찬가집인 《호메로스의 찬가》 제7장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찬가>에서 디오니소스에 대한 신화를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이 책을 끝낸다. 그 내용은 이렇다. “젊고 옷을 잘 차려입은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디오니소스 신은 해적에게 붙잡힌다. 해적들은 그가 상당한 몸값을 요구할 수 있는 부유한 통치자의 아들이라고 추측한다. 이 배의 키잡이만이 이 계획을 걱정한다. 왜냐하면 그는 디오니소스가 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에게서 적당한 위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해적들이 바다로 나아가자, 온갖 마법 지옥이 속박에서 풀린다. 바다는 포도주로 변하고, 돛대는 포도가 가득 달린 거대한 덩굴로 변하며, 마지막으로 디오니소스는 겁에 질린 해적들이 도망가 물속으로 뛰어들자 사자로 변하고, 해적들은 물속에서 돌고래로 변한다. 디오니소스는 자기 정체를 알아낸 키잡이만 살려둔다. 그 키잡이는 신에게서 사적인 축복을 받고 장수와 번영을 누린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에게만 그 사람의 인간성을 유지하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한다. 슬링거랜드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술취함의 혜택과 위험 모두를 인식해야만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찬가

난 이 책의 이 마지막 부분을 번역하면서 눈물이 났다(나는 ‘눈물이 났다’라는 것을 ‘감동했다’라는 뜻으로 흔히 사용한다). 사실 이 마지막 구절은 나에게 감동과 감탄을 자아냈다. 이 책 전체의 내용을 마지막으로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찬가>로 요약을 했든, 아니면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찬가>에서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집필했든, 이 찬가와 술취함의 미학을 이렇게 연결하는 슬링거랜드 교수의 천재성에 감탄했다. 어쩌면 천재성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디오니소스의 다양한 자료를 검토하면서 불현듯 이 찬가 내용을 마지막에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는 슬링거랜드 교수의 성실함이다. 그것이 슬링거랜드 교수의 천재성이든 성실함이든 간에 그 형식에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우리 앞에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찬가>와 《취함의 미학》이 있다. 이젠 이 둘의 형식이 아닌 그 내용에 감탄하면서 우리 모두 현대 사회에서 술취함의 미학을 실현시킬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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