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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Jan 09. 2023

술취함의 쾌락에 침묵해야 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1921)의 머리말에서 이 책의 전체적인 뜻을 이렇게 요약한다. “도대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의 맨 마지막 줄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말을 하면서 이 책을 끝낸다. 비트겐슈타인은 기존의 모든 철학적 문제가 언어가 왜곡되어 만들어진 가짜 문제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즉, 형이상학, 윤리학, 종교에서 말하는 신, 도덕, 자유와 같은 개념은 말장난일 뿐이라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 밖에 있다. 따라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세계 안에 있는 것은 수학, 논리학, 과학이고, 세계 밖에 있는 것은 형이상학, 윤리학, 종교, 철학, 예술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과학만이 진정한 학문이라고 생각했고, 이들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열광했다.


술을 마시고 취한 후에 느끼는 ‘쾌락’도 비트겐슈타인의 눈에는 말할 수 없고 침묵해야 하는 개념이다. 논리실증주의자가 아닌 우리 평범한 사람들도 ‘술취함의 쾌락’에 대해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열광하는 듯하다. 술취함에 따른 쾌락 자체를 공적으로 옹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 대부분은 쾌락 자체에 대한 욕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여전히 불편해한다.


이기적인 영장류 동물인 인간은 문화라는 동굴에서 생존하여 문명을 이끌기 위해 창의적이고 문화적이고 공공적인 동물이어야 한다. 이런 세 가지 성질의 동물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이 술취함이다. 술취함에는 다양한 기능적 이점이 있다. 창의성 강화, 스트레스 해소, 사회적 접촉 촉진, 신뢰와 유대 강화, 집단 정체성 형성, 사회적 역할 및 계층 강화 등을 통해 술은 사냥과 채집하는 인간이 농업 촌락, 마을, 도시의 군체 생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과정으로 인간 협력의 범위는 점차 넓혀졌고, 결국 지금과 같은 현대 문명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술의 이런 기능적 이점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는다. 마음껏 떠들고 자랑한다. 하지만 우리는 술이 삶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것을 놓치고 있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부담스러워하면서 침묵한다. 그것은 바로 술취함이 주는 순전한 쾌락적 즐거움이다.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즐겁고 기분이 좋으므로 술을 마신다는 것을 거의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사실 그렇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술로 인한 다양한 사건 사고를 목격해 왔다. 알코올중독, 음주운전, 술자리에서의 성희롱 등 술과 관련된 병폐로 인해 술 자체에는 긍정이 아닌 부정의 뉘앙스가 뿌리를 내렸다. 술과 연상되는 이런 병폐가 너무 크다 보니 감히 나는 술이 좋아서 마신다는 말을 못 하는 것이다. 앞서 보았던 술의 다양한 기능적 이점이 있음에도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자동차 운전은 상당히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동차와 관련된 크고 작은 사고도 엄청나게 자주 일어난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서 방어 운전을 해도 상대방의 실수로 인해 사고가 나기도 한다. 그래서 운전에는 안전한 수준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정부에서 사람들에게 운전은 위험하니 운전하지 말라고 권하지 않으며 그런 정책을 마련하지도 않는다. 좀 더 추상적으로 가보자.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도 사실 안전한 수준은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크고 작은 위험한 일과 사건이 일어난다. 삶 자체가 행복이라기보다는 삶 자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삶에 참여하지 말라고 권하는 사람은 없다. 살지 말고 차라리 죽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삶과 운전, 그리고 술취함에는 치러야 할 명백한 비용이 있다. 하지만 이 세 가지에는 이점도 있다. 똑같이 비용과 이점을 동시에 갖고 있는데, 왜 우리는 삶과 운전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지만, 술취함의 쾌락에 대해서는 침묵할까? 슬링거랜드 교수는 술취함의 쾌락에 침묵하는 인간의 성향을 서양철학에서 계속 내려와  지금의 우리에게 뿌리를 내린 심신이원론(마음-몸 이원론) 때문이라고 본다. 심신이원론은 마음과 몸이 구별되어 분리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성과 정신으로 대표되는 마음은 몸 밖에 실재하고, 감각 기관의 작용과 감정으로 대표되는 몸은 마음과 같이 생각하거나 사유할 수 없다. 마음은 몸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몸을 통제하는 도덕적 지성의 중심지이고, 몸을 매개하지 않고도 세계와 소통 가능하므로 몸에 대한 마음의 가치적 우월성이 인정된다. 따라서 이원론에서 감정과 욕망에 종속된 행위인 음주 행위는 합리적이거나 도덕적인 행위가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 인간은 태생적으로 술에 취하기를 원한다. 술취함에 따른 쾌락을 좋아한다.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 아버지에 대해 침묵했다. 술취함의 쾌락에 대해 우리는 홍길동처럼 살지 말자. 나는 홍길동도 아니고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으면 좋겠다. 술취함의 쾌락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입을 열자. 그러면서 우리의 몸과 뇌를 때리는 술(에탄올)의 물리적 쇄도라는 취함을 어떻게든 방어하면서도, 취함의 과잉에 혼란스럽고 위험한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면 된다. 술이 인간 이성의 자리인 전전두피질의 작동을 멈추게 할 때 나오는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면 된다. 디오니소스는 피리에 맞춰 춤을 추면서 우리를 문명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디오니소스는 우리를 동물로 바꾸어버릴 수도 있다. 그 동물은 창의적이지 않고 문화적이지 않고 공공적이지 않은 보통 동물로 바꾸어버릴 수도 있다. 이러한 우려를 염두에 두고서 술취함의 쾌락에 침묵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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