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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Jan 08. 2023

자아로부터 휴가를!

난 너무 진지한 사람을 싫어한다. 물론 사람이 진지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진지함은 혼자 있을 때이다. 혼자 있으면서 내일 할 일이나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고민하면서 진중하고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너무 진지하면 그 모임의 분위기가 딱딱해져서 편안함이 사라지는 경우도 생긴다. 물론 혼자 있을 때도 무조건 계속 진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도 무조건 진지함이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언제 어떻게 어느 정도 진지함을 버려야 하느냐에는 결국 정답은 없다. 나 역시 진지함을 적절히 잘 버리고 있는지도 자신이 없다.


슬링거랜드 교수는 인간이 문화라는 동굴에서 생존하고 잘 살아내기 위해 창의적(creative)이고 문화적(cultural)이고 공공적(communal)인 유인원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네모난 영장류 나무못을 원형의 사회적 곤충 구멍에 박아 넣으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 취함은 그렇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라고 말하면서, 3C의 특징을 가진 유인원이 되기 위해 술취함에 의지하라고 권한다.


하지만 인간이 적절히 버려야 하는 특징도 있다. 그것은 의식(consciousness)이다. 우리 인간은 ‘의식적’ 유인원이다. 나는 이 ‘의식’을 ‘진지함(seriousness)’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해프닝과 사건에 너무 관심이 많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도 너무 의식하고 주변 사람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인간은 어쩌면 나와 크게 관련이 없는 사건에도 관심이 많고, 나와 관련이 있는 타인과 그들의 언행에도 관심이 많으며,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관심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이 세 가지에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너무 피곤해진다.


인간은 의식적 존재라고 했다. 이는 인간이 자기를 의식하는 자아의 저주(curse of the self)를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자아의 저주란 자의식(self-consciousness)과 자아인식(self-awareness)의 부정적인 결과를 말한다. 자아의 저주는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생각하는 능력이 우리의 웰빙과 행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자아의 저주에서 한 측면은 자의식이 자기 회의, 불안, 부정적인 자기 평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결점이나 단점에 너무 집중할 때, 그것은 부정적인 감정과 낮은 자존감으로 이어진다. 자아의 저주에서 또 다른 측면은 사회적 비교와 부러움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을 비교할 때, 상대에게 질투심을 느낄 수 있고, 이는 부정적인 감정과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를 인식하는 자아는 우리에게 저주를 내린다.


우리 인간종은 다른 종은 걸리지 않는 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 병이란 의식적인 자아인식(conscious self-awareness)이라는 병이다. 이 병을 알고 있던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만약 내가 뭇 짐승 중 한 마리의 고양이라면, 이 삶에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이런 문제 자체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카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걸리는 이 의식적인 자아인식의 병에 걸리고 싶어 하지 않아서 차라리 동물이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알베르 카뮈

이 병을 고치기 위한 카뮈의 해법은 사실 실현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이미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정체성을 갖고 있으므로 이런 정체성을 버리고 고양이가 될 수는 없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우리 인간은 이성의 신인 아폴로의 영향을 받아 효율성, 건강, 도덕성의 이름으로 자의식에 빠져 있다. 이런 자의식의 늪에서 평생 있으면 안 되며 무조건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자아로부터 탈출하려는 충동은 거의 모든 이들에게 있다. 우리는 영구적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자아를 붕괴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직장 생활에서 피곤해지면 휴가를 떠난다. 직장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직장의 일을 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직장은 주어진 일을 능률적이고 효율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공간이다.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딱딱한 곳이다.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해서도 안 되는 합리적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서 매일매일 생활한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휴가가 필요하다. 이런 직장에서 벗어나는 휴가가 필요하듯이, 우리는 진지하고 심각하고 의식적인 우리 자아로부터도 벗어나 휴가를 떠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자아 휴가(vacation from the self)이다.


자아에서 벗어나려는 카뮈의 해법은 불가능하지만, 자아 휴가의 해법은 가능해 보인다. 그러면 어떻게 자아로부터 휴가를 떠날 수 있을까? 영국의 시인 바이런 경(Lord Byron; 1788~1824)은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인간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술에 취해야 한다”라고 그 해법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바이런 경

자아, 자의식, 자아인식의 중심에는 이성이 있다. 이 이성의 중심지인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 PFC)을 술로 공격하라는 것이 바이런 경의 해법이고, 이를 받아들인 슬링거랜드 교수의 해법이다. 자아로부터 휴가를 떠나기 위해서는 넉넉한 휴가비가 필요하다. 술이라는 휴가비를 지참하고 자아로부터 멀리 벗어나 잠시 휴가를 떠나자. 그런 휴가가 자아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우리는 그 휴가지에서 무의식을 ‘꽃처럼 열리게’ 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가끔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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