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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과 방사능은 전쟁을 닮았다

씨줄과 날줄, 사유의 확장 13. 페스트, 체르노빌의 목소리 1부

by Book끄적쟁이

씨줄과 날줄, 사유의 확장 13. 페스트, 체르노빌의 목소리 1부

(연관성이 있는 2권 이상의 책을 엮어 사유의 폭을 확장하는 이야깃거리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이상한 전쟁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친다고 다 전쟁은 아니다. 재난, 재해, 사고, 뭐라고 부르든.

하지만 페스트와 체르노빌은 전쟁이라 불러도 될 만큼 그걸 닮았다.

물리쳐야 할 적이 있다는 점. 단지 보이지 않을 뿐.


아무런 기습도 없었다. 대신 뢴트겐, 퀴리가 거기에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내가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체르노빌에서는 정반대였다. 집에 가면, 바로 그때 죽는다.


조짐


페스트는 194X 년 오랑에서 발생했다. 의사 리유는 층계참 한복판에서 빠끔이 벌린 주둥이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 변두리 지역 어떤 골목에선 팽개쳐진 쥐를 10여 마리나 보았다. 그 후 며칠이 지나자 사태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단 하루 동안에 6천2백31마리의 쥐가 수거, 소각되었다고 알릴 정도였다.


원자로 폭발은 1986년 체르노빌에서 발생했다. 늙은 양봉가는 아침에 정원에 나갔지만 익숙했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벌이 한 마리도 없는 것이다. 이튿날도 벌들은 벌통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흘째도...

물고기잡이 미끼로 사용할 지렁이를 찾던 어부들도 땅을 파고 또 팠지만 한 마리도 못 찾아 고기를 잡지 못했다.


전쟁 발발


모두가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막상 재앙이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불안과 믿음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고 있게 되는 것도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1986년 4월 26일 1시 23분 58초. 벨라루스 국경에 인접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제4호 원자로가 몇 차례의 폭발 후 무너졌다.
chernobyl-nuclear-power-plant-chernobyl-city-painting-illustration_250484-1255.jpg 체르노빌 원전사고, 출처: 프리픽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분명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 것이라서.

희생자들이 딴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다. 단지 겸손할 줄 몰랐다는 것 뿐이다. 자기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했기에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을 뿐이다.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
226C013A543BCE5825 페스트 흑사병, 출처: 세상의 모든 정보


대피


시의 문들이 폐쇄되자 그들은 모두 같은 독 안에 쥐가 되었으며 거기에 그냥 적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 말해주지. 비행기가 날아다녔어. 매일. 아주, 아주 낮게, 머리 바로 위로 날아다녔어. 원자로로, 발전소로 연달아 날아갔어. 그때 우리는 대피했어. 이주하고. 집이 많이 털렸지.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숨었어. 가축이 울부짖고 아이들이 징징거렸어. 전쟁이다!


장교가 소리쳤어.

'할머니, 곧 여긴 다 불태우고 묻어버릴 거예요. 나오십시오!' 그러고는 나를 어딘가 낯선 곳으로 데려갔어. 어딘지 모르겠어.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니야.


로봇이 못 견디고 기술이 미쳐가는 곳에서 우리는 일했다. 귀에서, 코에서 피가 났다. 기관지가 간지러웠다. 눈이 찌르는 듯이 따가웠다. 뭔가 낮은 소리가 계속해서 귀청을 울렸다. 갈증이 났지만, 식욕은 없었다. 혹시나 방사성 먼지를 쓸데없이 들이마실까 체조도 금지됐다. 그러면서 일하러 갈 때는 뼈대만 남은 차를 타고 이동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금지구역'이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전쟁을 겪은 적은 없지만 뭔가 비슷한 느낌이었다.


전쟁 피해


멀리 떨어진 가족들이 만나거나 소식을 주고받을 수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예기치 못했던 돌연한 생이별, 업무차 잠시 머물려했던 곳에 갇힌 귀양살이. 연락 두절, 차량 운행 정지, 식량 배급. 페스트의 무지막지한 침범은 시민들을 마치 개인적인 감정 같은 건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만들어버렸다. 전염의 매개물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각종 서신 교환이 금지되었다. 도시 밖에 있던 가족이 들어가는 것은 자유지만 다시 나가진 못한다. 서로 만나기 위해선 페스트라는 죽음의 한 복판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죽음이 주위 모든 것을 덮쳤는데, 뭔가 다른 죽음이었다. 새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익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방사선은 형체가 없다.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땅에서 뽑힌 풀이 그들을 죽일 수도 있다. 낚아 올린 물고기가, 사냥한 들새가, 사과가...

유순하고 친절했던 주변 세상에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반격(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의사 리유의 의지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병고의 유익한 점을 증명하려 하기 전에 우선 치료부터 하는 것이 옳습니다."

"침묵하고 있는 하늘만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우는 것이 더 합당한 일입니다."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놓은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외부인 랑베르의 돌연한 태도 변화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는 늘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과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이제는 볼 대로 다 보고 나니 나는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파늘루 신부의 태도 변화


'미처 죄를 지을 사이조차 없었던 이 어린아이는 대체 무엇에 대하여 벌을 받은 것이란 말인가?'


소비에트 군인의 의지


"물론 위험한 일이지. 방사선이라니까... 위험한 게 맞소. 하지만 누군가는 뭔가 해야 하지 않겠소. 안 그랬으면 왜 우리 아버지들이 전쟁터에 나갔겠소?"


벨라루스 민족의 당부


"적어 두세요.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이해 못 했지만 그렇게라도 남겨두세요. 누군가 읽고 이해하겠죠. 나중에, 우리가 죽은 후에..."


종전


보건대 사람들이 피로가 극에 달하고 하루하루 벌어지는 일에 무감각해질 때쯤, 통계는 병세의 후퇴를 나타내고 있었다. 페스트는 갑작스러운 침범만큼이나 갑작스레 퇴각하였다. 시민들이 선뜻 기뻐하지 못할 정도로.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은 페스트 퇴치 후 생활 계획에 대해서 즐겨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삶의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다.


고무옷을 입고 고무장갑을 낀 군인들이 뛰어다녔다. 그들은 명령을 실행했다. 쉬는 날은 없었다. 도시를 '세탁'하고 오염된 흙을 20센티미터 정도 파낸 후 깨끗한 모래로 덮었다. 지금도 체르노빌에는 영웅을 위한 기념비가 있다. 바로 핵의 화염을 잠재운 그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석관이다. 20세기의 피라미드와 같은 곳이다.

미드 체르노빌.jpg
체르노빌 석관.jpg
(좌)체르노빌의 영웅, 출처: 미드 체르노빌 / (우) 체르노빌 석관, 출처: 두피디아


하지만 진짜 전쟁은 지금부터...


전쟁 후 충격으로 자신도, 세상도 완전히 변했다 - '전쟁과 평화' 베주호프 백작


2011년 3월 12일, 하루 사이에 후쿠시마는 새로운 역사적 공간으로 이동했다. 1986년 4월 26일 밤 이후의 체르노빌처럼...

그 땅에 흩어진 방사성 핵종은 5만, 10만, 20만 년, 아니 그보다도 더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영원하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우리는 무엇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수치가 많다. 너무나 끔찍하기에 지금도 기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끝났다는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다. 병원균(방사능)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그 균은 수십 년 간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언젠가 인간에게 불행과 교훈을 알려 주기 위해서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

자식을 빼앗긴 어머니라든지 친구의 시체를 묻게 된 사람에게 종전이라는 것은 찾아오지 않았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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