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리스본 1일 차 - 광장

어쩌다 보니 관광명소

by 카이저 소제

20대의 딸과 50대의 엄마는 나이차이만큼이나 여행을 준비하는 방식이 달랐다. 인터넷 검색으로 여행 정보를 수집하는 딸은 엑셀 파일에 날짜별 시간대별 동선을 촘촘하게 짜고 있었다. 여행안내 책자 두 권을 읽고 머리가 뒤죽박죽 띵해진 엄마는 다양한 변수를 감안하여 날짜별 아우트라인만 잡아두었다.

여행 계획을 짜는 방식은 다르지만 가보고 싶은 곳 목록은 거의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여행안내 책이나 인터넷에 있는 정보가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에그타르트 맛집 탐방'을 포르투갈 여행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여기는 딸과, 굳이 같은 빵을 매번 가게 바꿔가며 먹어야 되는지 이해가 안 되는 엄마, 그 정도였다.


리스본에 도착한 첫날, 시차 부적응으로 피곤할 줄 알았는데 기대와 설렘 때문인지 오히려 몸이 가뿐했다.

신체에 부하되는 스트레스를 넘어서는 뇌의 작용이 있는 것이다.

도착한 날 오후 일정의 중심에는 '코메르시우 광장'이 있었다.

우리의 야심 찬 일정에 따르면,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거리인 '아우구스타 거리'를 유유자적 걸으며 리스본의 도심을 구경하다가,

리스본 특선 메뉴로 배불리 점심을 먹고,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진 후에,

광장에 접하고 있는 테주 강변을 놀멍쉬멍 거닐다가 강으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본다...가 리스본 도착 당일 반나절의 계획이었다.


숙소에서 코메르시우 광장까지는 걸어서 30분 거리.

리스본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쾌적했다.

여행지에서의 첫날 첫 외출.

아직도 그날 그 순간의 대기의 기운과 소란한 골목의 냄새와 기분 좋은 설렘이 공감각적으로 기억난다.

오래도록 기억되겠지.


좁은 골목을 벗어나니 탁 트인 광장이 나온다.

광장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동상 앞에는 <이곳이 유럽>임을 보여주는 고풍스러운 분수가 여러 갈래로 물을 뿜어내고 있다.

여기는 어딘가?

그제야 광장의 파도치듯이 규칙적인 바닥 무늬가 눈에 들어온다.

"호시우 광장 같은데 ...?"

"에이...설마..?!"

여행책자 사진으로 본 호시우 광장은 크고 화려했다.

사진 속 울렁불렁한 파도치는 듯한 바닥무늬는 현란한 매직아이처럼 시선을 빨아들였는데, 실제로 발 딛고 서있는 광장은 사진 속 이미지처럼 크고 화려하지 않다. 다만 말할 수 없이 평화롭다.

광장 중앙의 분수, 광장 주변을 메우고 있는 식당과 카페의 노천 테이블, 노천 테이블 위를 걸어다니는 갈매기, 갈매기를 쫓아내지 않는 사람들, 사람들로 붐비지만 소란스럽지 않은 곳, 차분하면서도 생동감이 느껴지는 곳.

호시우 광장의 첫인상이다.

심지어 광장 한편에 있는 맥도널드 가게 앞에서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Wake up !>을 외치며 맥도널드 불매운동 시위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평화로웠다.

광장의 분위기가 평화로워서 내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졌는지, 내 마음이 평화로워서 광장의 이미지가 이리도 좋게 기억되는지는 모르겠다. 광장 주변 식당에서 풍기는 맛있는 냄새가 점심식사에 대한 기대를 한껏 끌어올린 것도 내게 강 같은 평화를 느끼게 한 이유일 것이다.


호시우 광장을 벗어나니 또 작은 광장이 나온다.

광장 가운데를 차지한 청동상이 '이곳도 광장' 임을 말해준다. 바로 피게이라 광장이다.

피게이라 광장의 청동상은 달리는 말을 타고 있는 역동적인 모습이다.

포르투갈 역사에 빛나는 왕이나 영웅들을 청동상으로 만들어 세워두었을 테지만 그 역사와 인물을 모르니 재미가 덜하다.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방향을 잡고 가는데 먼 발치에 낯익은 건물이 보인다.

바로 호시우 기차역이다.

말발굽 모양의 아치형 문으로 유명한 바로 그 기차역.

건축양식에 대한 심미안이 없는 중에도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고풍스러우면서 온갖 애환이 담긴 내 마음속 엔틱한 건물은 '옛날 서울역'만한 것이 없다.

결국 경치며 건축물도 개인의 경험과 앎에 기반하여 그 값어치를 발하는 것인가 보다.

어쨌든 그 유명짜한 호시우 기차역과 호시우 광장에 덧붙여 피게이라 광장까지 엉겁결에 보고 나니 어쩐지 숙제 하나를 끝낸 듯이 후련하고 뿌듯했다.

계획대로라면 리스본 2일 차 여행코스를, 어영부영 가는 걸음에 두루 둘러본 셈이다.

관광명소가 밀집된 리스본 여행의 장점이다.


호시우 기차역을 지나 코메르시우 광장까지 가는 거리, 즉 아우구스타 거리는 보통의 도심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식당과 빵집과 카페와 옷가게, 기념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왜 아우구스타 거리, 즉 8월의 거리라고 칭송하듯 불리는지는 더운 8월에 와봐야 알 수 있으려나.

다만 보행자 전용도로 가운데를 점령하듯이 메운 노천 테이블은 독특하고 운치가 있다.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개의치 않고 노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유 있어 보인달까.


아우구스타 거리 끝에서 마주치는 거대한 아우구스타 개선문.

'승리의 아치'라 불리는 개선문 꼭대기에는 리스본 시내를 조망하는 전망대가 있다. 리스보아 카드로 무료입장되지만 내키지 않아서 스윽 일별하고 지나쳤다. 개선문이라는 것이 결국 자국의 강성함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닌가. 그건 자국민들의 몫이다.

개선문을 통과하면 바로 코메르시우 광장을 둘러싼 회랑으로 이어진다. 마치 거울 속 거울처럼 같은 모양이 계속 반복되는 회랑의 건축양식이 아름답다. 긴 회랑에서 잠시 넋을 놓았다.

ㄷ 자 모양으로 연결된 노란색 회랑이 코메르시우 광장을 에워싸는 모양새다. 회랑이 없이 탁 트인 곳은 바로 드넓은 테주강이다.

바다라고 해도 믿을 만큼 넓고 심지어 파도도 치는 큰 강. 테주강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멀리 보인다.

원래 궁궐이었던 이곳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때 폐허가 된 이후 광장으로 재건됐다고 한다. 광장 가운데 있는,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테주강을 내려다보는 동상이 바로 당시 황제였던 주제 1세.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을 재건한 왕이라 그런지 풍기는 아우라가 남달라 보인다.

위풍당당한 주제 1세 앞에서 인증샷을 남겼다.


화요일 낮인데도 테주 강가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다.

강변을 따라 걷는데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곧 대차게 쏟아지는 빗줄기.

가지런하게 내리는 비가 아니라 바람에 밀려 사방팔방 들이치니 3단 접이 소형 우산이 무소용이다.

뒤집어진 우산을 바로잡을 새도 없이 일단 회랑으로 후다닥 피신.

회랑은 비를 긋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과 그 사이로 우산을 내미는 발 빠른 상인들로 북적인다.

아, 이것이 바로 <포르투갈 우기>의 진면목이구나.

길거리 기념품 가게들마다 입구에 우비가 펄럭이고 우산이 쌓여있는 이유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비바람과 함께 기온도 확 떨어진다.

악천후로 인해 테주 강변 산책은 취소.

강변에서의 저녁노을 감상도 더불어 취소.

거봐, 계획대로 안된다니깐 !


갑작스럽게 끼어드는 변수는 여행 계획을 마구 흔들어버리기도 하지만, 지나고 보면 삐뚤빼뚤 갈지자 일지언정 일정은 순조롭게 마무리되곤 했다.

리스본 도착 당일, 어쩌다 보니 마주치고 지나간 광장만 네 군데니 말해 무엇하랴.


택시에서 내린 후 숙소를 찾으며 허둥지둥 지나친 '헤스타우라도레스 광장'.

너른 차도의 중간에 자리 잡은 이곳은, 사실 높이 솟은 기념비와 사진 찍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광장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자박자박 걸어가면서도 미처 정체를 알지 못했던 평화롭고 나른한 '호시우 광장'.

호시우 광장 옆에 슬쩍 숨어있던 자그마한 '피게이라 광장'.

그리고 궁궐터라 그런지 어딘가 모르게 풍수지리 기운이 세 보이는 '코메르시우 광장'.

직접 걸어 다녔던 리스본의 광장은 여행안내 책자 속 이미지랑은 많이 달랐다.

가볼 만한 여행지로 과대포장 되었다는 생각도 솔직히 든다. 광장에 자리 잡은 동상과 그들의 역사를 모르니 느끼고 즐기기에 한계가 있었으리라. 포르투갈 독립의 역사를 알았다면 발음도 어려운 헤스타우라도레스 광장의 기념비가 달리 보였을 수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 서울의 1/4 크기인 자그마한 도시.

도보 30분이면 가볼 만한 곳 체크리스트의 상당한 목록에 말 그대로 체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리스본 거리의 광장들은 크고 화려하지는 않다. 하지만 도심의 곳곳에 쉼터처럼 자리한 광장들과 광장을 에워싼 느긋한 평화로움이 좋았고 또한 부러웠다.


한 때는 민주주의를 외치는 처절한 공간이었다가,

이제는 정체 모호한 진영싸움의 본진으로 전락해 버린 우리나라의 도심 광장을 떠올리니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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