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집 다락방에는 온갖 책들이 먼지 속을 굴러다녔다. 근현대 문학전집, 누군가의 시집, 선데이 서울..
손에 잡히는 대로 읽으며 책 읽는 재미에 폭 빠졌다. 그 이후 나의 장르불문 책사랑은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길을 걷다가, 혹은 여행 중에 마주치는 동네서점이나 북카페는 말마따나 참새방앗간이다.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책이 있는 풍경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여행명소에는 의외로 서점이 많았다.
리스본에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으로 기네스 북이 인정한 '베르트란드 서점'이 있었으며, 포르투에는 해리포터를 좋아하는 자는 절대 피해 갈 수 없다는 '렐루 서점'도 있었다.
두 군데를 모두 여행일정에 집어넣었다.
나이 든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을, 해리포터 영화와 책을 보며 어린 시절을 보낸 딸은 후자를 찜했다. '엄마를 위하여'라고 크게 생색내며 딸이 찾아낸 서점이 하나 더 있었다. '르 드바가르',즉 '느리게 읽기'라는 뜻의 이 서점은 인쇄소를 서점으로 바꾼 곳이라 한다. 내친김에 이곳도 일정에 집어넣었다.
그리하여 포르투갈 여행에서 모두 세 군데의 서점을 둘러보았다.
포르투갈 여행명소에는 왜 서점이 많을까.
나름의 서사를 가진 서점들이 여행객의 시선을 당기고 자가발전 하듯이 입소문이 난 것일까?
아니면 관광산업의 일환으로 MSG 팍팍 쳐서 입소문을 낸 것일까.
포르투갈의 서점들을 두루 다니며 든 생각.
책이 있는 공간을 좋아한다면 가볼 만한 곳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시간 쪼개고 발품 팔아서 갈 이유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 물론 이름난 관광지의 인증사진이 필요한 경우는 말이 달라진다.
코메르시우 광장 앞에서 퍼붓는 비를 피하며 망연자실 서 있는 그때, 회랑 안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우산 장수들이 내미는 우산을 덥석 사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비가 곧 그친다는 뜻이다.
잠시 뒤 거짓말처럼 비가 뚝 그쳤다. 하지만 하늘은 흐리고 공기는 서늘했다.
강변에서 여유자작 한가롭게 저녁노을을 감상하기는 힘들 듯하여 다른 곳으로 가기로.
구글지도를 켜고 베르트란드 서점, 즉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서점으로 방향을 잡았다.
걸어갈 수 있는 곳이라 갑자기 일정이 바뀌어도 부담이 없다. 지도앱을 보며 천천히 걸어가는데 곧 평평한 길이 끝나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온다.
비에 젖은 돌길이 미끄러운 데다가 오르막이니 걷기가 쉽지는 않다. 발을 떼고 놓을 때마다 발바닥에 힘이 꽉꽉 들어간다.
동남아에서 흔히 보는 툭툭이가 여기저기서 달리고 있다. 툭툭이를 세워둔 채 가격표를 들이밀며 호객을 하기도 한다. 리스본은 정말 관광지로 특화된 도시다.
숨이 헉헉 차오를 즈음에 만난 베르트란드 서점.
정면이 아닌 옆면 벽을 먼저 마주친다.
여행 책자에서 본 그대로의 빈티지한 매력이 있다.
포르투갈의 전통 타일양식인 푸룻 푸릇한 아줄레주 타일공예로 장식된 벽면이 고풍스럽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서점 정면.
작은 출입문이 달린 서점을 정면에서 마주한 첫 느낌은, '어? 디기 작은데?'의 실망감.
골목길 어디에서나 봄직한 작은 동네서점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이라는 타이틀이 없었다면 과연 사람들이 여행명소로 찾아올까 싶기도 하다.
좁다란 서점 주위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인증샷 한 장 남기려고 대기 타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비켜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관광객을 태운 툭툭이 기사가 내지르는 소리다.
툭툭이를 탄 채로 서점 입구 사진만 찍고 휙~지나가는 사람들. 여행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는 다른 사람들 사진배경으로 찍혀 들어갈 듯하여 서점 사진만 찍고 후다닥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1732년에 문을 열었다는 베르트란드 서점.
현재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50여 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50여 개의 지점이면 꽤 큰 기업 아닌가. 이렇게 단층의 작고 소박한 낡은 서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시끌벅적한 밖과 달리 서점 안은 숨소리도 조절하는 듯 조용하다. 서점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책사이를 조용조용 걸어 다닌다.
밖은 소란스러운 비냄새, 안은 착 가라앉은 책냄새.
서점 안은 오래된 서점다웠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들어차 있는 책장에 책이 빼곡하다.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를 제외한 모든 곳에 책이 진열되어 있다. 책 구경만으로도 재밌다.
포르투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코너가 보인다. 아는 작가가 눈에 띄어 반갑긴 한데 그의 책 중 유일하게 읽은 '눈먼 자들의 도시'가 썩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는 않아서 그냥 지나쳤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도 보이고 로알드 달의 동화책도 있다. 산더미 같은 책 속에서도 읽었던 책은 눈에 쏙쏙 들어온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인가.
딸이 내 팔을 잡아끌더니 한쪽을 가리킨다.
책장의 아래쪽에 눈에 익은 이름과 책표지가 보인다.
'HAN KANG / A VEGETARIANA'
한강 책 코너다.
책장의 한 칸에 한강의 책만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모두 네 종류의 책.
영어도 보이고 낯선 문자도 보인다. 포르투갈어인지 스페인어인지 라틴어인지...
'채식주의자' '흰' '희랍어 시간', 읽지 않은 나머지 한 권은 제목이 뭔지도 모르겠다. 한강의 책들이 언제 이렇게 많이 번역되어 있었나.
뿌듯했다.
유럽의 서쪽 끄트머리 작은 나라의 높다란 언덕배기에 있는 아주 오래된 서점에서 만난 우리나라 작가의 책이라니. 그것도 현지어 번역본으로.
딸이 '한 권 사지?'라고 한다.
읽을 수도 없는 책을 뭐하러..했는데, 간결한 문장의 '흰'은 한 권 사 왔으면 좋았을 듯싶어 후회가 된다.
서점에 들어설 때만 해도 좁다고 느꼈다.
근데 작은 공간은 아치형 통로를 통해 다른 공간으로 이어진다.
책으로 가득한 공간이 연달아 연결되어 있으니 아늑한 아지트 같은 느낌이다. 책으로 만든 동굴 같기도 하다.
소박하고 작아 보이던 서점은 생각보다 널찍했다.
서점의 제일 안쪽 구석진 작은 공간에는 아담한 카페가 있다.
'페소아'의 그림이 걸려 있다는 카페.
여행을 앞두고 페소아의 책 '불안의 책'을 읽었던 터라 관심이 갔다만 굳이 그림을 찾아보지는 않았다. 커피 한잔 마실 것도 아닌데 둘레둘레 카페 구경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비에 젖고 피곤해서 따뜻한 차와 커피가 심히 당겼지만 커피 향만 들이키고 나왔다.
다음으로 가야 할 곳이 서점에서 도보 30초면 갈 수 있는 '카페 브라질레이라'이기 때문이다.
이 카페는 바로 페소아의 동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