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리스본 1일차 - 카페

페소아는 어디에...

by 카이저 소제

포르투갈 여행의 장점 중 하나는 여행명소들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어지간한 곳이면 걸어서 이동가능하고 동선만 잘 짜면 최소 걸음으로 최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하루 2만 보 이상 걸어 다니기는 다반사.

덕분에 리스본과 포르투의 카페를 무수히 드나들기도 했다.

실제로 포르투갈 여행 중 체크카드 사용이 가장 빈번한 곳이 카페였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뜨거운 볕을 피하기 위해,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다만 갈증이 나서, 너무 경치가 좋은 곳이라, 소문난 명소라 들러보고 싶어서 등등 카페를 드나든 이유도 다양하다.

여행을 준비하며 미리 좌표를 딱 찍어서 간 카페는 두 곳.

리스본의 '아 브라질레이라'와 포르투의 '마제스틱'이다.

공교롭게도 두 카페 모두 여행명소인 서점 근처에 있었다.

'아 브라질레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바로 옆에, '마제스틱'은 해리포터 서점이라 불리는 '렐루 서점'의 지근거리에 있었다.

서점 먼저 들렀다가 카페로 이동하는 동선도 같다.


'신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인간은 신의 노예다'

페르난도 페소아의 책 '불안의 책'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글을 읽고, 책 제목이 '불안의 책'인 것이 와락 이해되었다고나 할까.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 작가를 꽤 잘 알게 된 듯한 친근감도 생겼다. 리스본에서 페소아의 흔적을 찾아봐도 좋을 듯했다.

그래서 찾아간 카페 '아 브라질레이라'.

1905년에 문을 열었으니 무려 120년 역사를 버텨온 곳이다.

살아생전 페소아가 이곳에서 커피나 압생트를 마시며 글을 쓰고 문학모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근데 압생트라고?

압생트라면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의 예술가들이 즐겨 마셨다는 바로 그 문제적 술 아닌가.

알코올도수가 40도를 넘는 이 술은 가격이 저렴한 반면에 독성이 있어서 정신착란이나 정서적인 문제를 불러올 수 있었다고.

고흐가 즐겨마시고 세상을 온통 노랗게 봤다고도 하는 바로 그 술.

물론 요즘 압생트는 독성을 제거해서 안전하다고 한다.

페소아의 초상화에서 보이는 어딘가 선병질적이고 강퍅한 이미지와 불안의 책, 그리고 압생트.

물론 내 생각의 흐름이 이렇게 흘러갔다는 것이지 페소아의 생전 성격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이 카페에는 1988년에 제작된 페소아의 동상도 카페 앞에 놓여있다고 하니 겸사겸사, 오래된 카페도 구경하고 페소아의 동상도 볼 수 있는 곳이다.


베르트란드 서점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져 있는 카페는 엄청나게 붐볐다.

활짝 열린 출입문 언저리에서 안을 기웃 들여다보니 빈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카페 내부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입구조차 붐빈다.

카페 앞 노천테이블도 붐비기는 매 한 가지.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다.

평일 오후 카페가 이렇게 붐빌 줄은 몰랐다.

정장에 가까운 유니폼을 입은 직원에게 두 사람이 앉을 자리가 있는지 물어보니 안으로 들어오란다.

정말 딱 두 사람이 끼어 앉을 자리가 있다.

옹색해 보이는 작고 동그란 탁자 앞에 놓인 의자 두 개.

평소라면 이런 자리에 앉을 바에야 도로 나오고 말 테지만 부러 찾아온 곳이니 자리가 있다는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탁자와 의자가 다닥다닥 붙어있으니 낯선 사람들과 일행인 듯 붙어 앉아 있어야 한다.

옆 자리에 앉은 노부부로 보이는 백발 성성한 두 사람이 여행안내지도를 펴놓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공연히 그들의 일정이 궁금해서 여행지도 위를 넌지시 커닝하듯이 슬쩍 보았다.

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당 딸리고 피곤한 나는 핫 초콜릿을 주문했다.

꽤 너른 카페 진열대에는 에그타르트를 비롯한 빵들이 화려하게 시선을 잡아끈다.

대충 구색만 갖춘 디저트가 아니라 식사용으로 먹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빵이 있다만, 뽈보로 점심을 거하게 먹은 탓인지 식욕이 당기지는 않는다.

자그마한 유리컵에 담겨 나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향긋했고 핫초콜릿은 진하고 맛있었다.

카페인과 당을 섭취하니 옹색한 자리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느긋해진다.

그제야 카페를 천천히 둘러볼 여유가 생긴다.

눈치껏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금색과 녹색이 짙은 나무색과 멋지게 어우러진 공간.

이런 것을 가리켜 클래식하다고 하나.


옆자리에 앉아있던 노부부가 주섬주섬 일어서면서 탁자 위에 동전 몇 개를 놔둔다. 팁을 챙겨두나 보다.

우리가 길을 터줘야 나갈 수 있어서 일단 우르르 같이 일어나서 비켜주고 다시 착석.

빵이라도 천천히 뜯어먹고 있으면 몰라도 마실 것 한잔씩 호로록 마시고 나니 더 앉아 있기도 애매하다.

그래, 한 번 와 봤으면 됐지.

카페 들어온 김에 화장실도 다녀온 후 다음 동선을 확인하고 체크 플리즈 ~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핫초콜릿 한 잔에 9,5유로.

우리 돈 14,000원쯤인가.

카드결제를 하면서 팁을 아주 잠시 고민했지만 팁문화가 익숙지도 않거니와 수중에 동전이 없었다.

그리고 너무 약소하게 엉거주춤 쉬다가 나와서 굳이 팁을 줘야 할 마음도 생기지는 않았다.


참고로 포르투갈의 식당이나 카페 화장실은 대부분 지하에 있었다.

널찍한 건물이 아니면 대부분이 그랬다.

카페나 식당 내부가 대체로 길쭉하고 협소한데, 좁은 공간을 활용하는 방편으로 화장실은 지하에 뒀나 싶다.

화장실 사용은 모두 무료다. 따로 동전이나 카드를 준비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단, 스타벅스는 화장실 잠금장치에 영수증에 있는 번호를 꾹꾹 눌러야 문이 열렸다.

평소 습관대로 영수증을 구깃구깃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화장실 문 앞에서 소중하게 펴서 썼다.


빈자리를 찾느라,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주문을 고민하느라, 커피 맛을 음미하느라, 사진을 찍느라...정작 중요한 것은 빼먹어버렸다.

페소아의 동상을 보겠다는 원래의 카페방문 목적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동상이 있는 노천 테이블 주변은 사람들로 붐비는 소란스러운 도떼기시장 같아서 그곳에 페소아의 동상이 있다는 사실도 잠시 까먹고 있었다.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들, 복닥이는 사람들 속에서 조용하게 미동 없이 앉아있는 동상을 찾기는 힘들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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